[김진국의 심심(心心)토크]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김진국의 심심(心心)토크]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 승인 2020.01.3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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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성의 '시인본색'과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수목원을 걷고 있는 연인 / 연합뉴스
수목원을 걷고 있는 연인 / 연합뉴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전문

내가 정희성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나왔다. 대학생 형이 방학 때 고향집에 두고 간 책과 LP 레코드판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을 내가 발견해서 읽었을 것이다.

아무리 서정시라고는 하나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중학생에게 도시 빈민 노동자의 회한을 그린 시가 큰 감흥이 있었을까? 물론 그 시절 세상에서 무시무시한 격변(1979년 '10·26'과 '12·12' 사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이 시가 그런 어두운 근대화, 산업화의 이면과 맞닿아 있다는 것 정도는 중학생인 우리도 어렴풋이 짐작하는 정도였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정희성 시인과 그의 시는 나의 머리에 꽤 인상 깊게 각인이 되었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되고나서 그의 시집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대학 신입생이 개강 첫날부터 1교시 수업도 하기 전에 최류탄과 지랄탄의 메케한 연기에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던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이었으니 오죽 했을까.

지금 보면 유치해 보일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이념서적’ ‘불온서적’이라 불리던 사회과학 서적들을 심각하게 탐독하던 시절이었고,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뜬 새내기 대학생의 눈에는 내가 불온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불온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정희성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서울서 학교를 나온 동기생이 “정희성 시인은 우리 학교(숭문고) 국어 선생님이셨어!”하는 소리를 듣고 이유 없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 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 시인 본색(本色), 전문

위의 시 ‘시인본색’은 <돌아다보면 문득>(창비,2008)에 실린 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1978년에 에 이어 2008년에 나왔으니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존재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는 1945년생인 정희성 시인의 30대 초반의 모습과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면, <돌아다보면 문득>에는 이순(耳順)을 넘긴 시인의 연륜이 생활 속의 에피소드 속에서 배어 나온다.

영웅 나폴레옹의 멋진 모습도 그를 항상 곁에서 지켜보던 비서의 눈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일 수 있다. 고고한 학처럼 살아 갈 것만 같은 시인도 아웅다웅, 알콩달콩 함께 살아가는 배우자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남편으로만 보이는 게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영웅본색’이나 ‘시인본색’은 서로 통한다.

어느 날 카톡방에서 한 선배가 ‘시인본색’과 이 시를 패러디한 내용을 올렸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정희성 시인이 다시 떠올랐고,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 시 ‘시인본색’을 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시인 형님께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내드렸다.

물론 형수님께도 같이 보내드리면서 각각 상대방에게 보내드린다는 사실도 함께 고지(告知)해 드렸다. 예상대로 형수님은 무응답이고, 시인 형님은 ‘ㅎㅎ’으로 즉각 응답해 오셨다. 두 분이 다 이 시에 공감하신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물론 이 시는 내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내 아내의 동료대원들은 나를 보면, “아이고, 집사님은 좋겠어요. 이렇게 예쁘고 자상한 아내를 두셨으니 말이에요!”

그럴 때는 나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잘 모르는 분에게는 “아, 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농담이 통할 것 같은 분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같이 살아보셨어요? 살아 보시면 그런 말 안하실 걸요!”

물론 나의 농담에 사람들은 같이 허허하고 웃고 만다. 겉으로는 천사지만, 학교 선생 아니랄까봐 매사에 남편을 가르치려드는 아내, 술이라도 한잔 하고 들어가면 더욱 냉랭해지는 내 아내의 ‘아내본색’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정희성 시인의 부인의 심정이 꼭 나와 같았을 것이다. “고고한 학처럼 좋은 시를 쓰고 살아가는 시인의 반려자이니 얼마나 행복할까요?” “정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바로 시가 아니면 뭐겠어요?”

시인의 부인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잘 모르는 사람의 말에 정색하고 반박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짐짓 혼잣말로, 그러나 시인더러 분명히 들으라며 한마디 하는 것이다. “학 좋아 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그런데 시인의 아내가 하는 마지막 말이 더욱 압권이다.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뼛속까지 시커먼 그 오골계 말이다. 아무리 유감천만이라도 그렇지 오골계까지 들먹이실 게 뭐람. 허허허!

예일대 로버트 스턴버그 교수는 '사랑의 삼각형이론'을 주창한 심리학자다. 그에 의하면 온전한 사랑은 열정과 친밀감과 헌신(책임감)의 3가지 요소로 이뤄진다고 한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여 아무 것도 안 뵈는 열정의 시기가 지나면 권태기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사랑의 호르몬이 철철 넘쳐흐르는 시기를 지나 필연적으로 찾아올 권태기를 잘 이겨내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고, 서로간의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노력을 스턴버그 교수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친밀감과 헌신이 될 것이다. 물론 정희성 시인과 그 부인은 열정을 넘어 친밀감과 헌신으로 평생을 살아온 잉꼬부부일 것이라 확신한다.

나 역시 눈에 콩깍지는 벗겨졌을지 몰라도, 또한 첫 만남 때만큼의 열정은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열정과 친밀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헌신하려고 한다. 이거 마누라가 본다고 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ㅎㅎ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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