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길 칼럼] 효심(孝心)은 아름다웠네
[송장길 칼럼] 효심(孝心)은 아름다웠네
  • 송장길(언론인·수필가)
  • 승인 2020.01.28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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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등 신사임당의 7남매가 부모에게 올리는 효도 진다례 시연 모습 / 연합뉴스
율곡 이이 등 신사임당의 7남매가 부모에게 올리는 효도 진다례 시연 모습 / 연합뉴스

설 명절 내내 <효(孝)>가 머리 속을 맴돌았다. 차례를 지낼 때와 성묘를 다닐 때는 물론, 친족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무시로 떠올랐다. 심지어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더러는 <효>라는 이미지가 입혀져 있었고, 효도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그만큼 <효>는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흐르고 있고, 문화의 한 중요한 요소로 내재해 숨쉬고 있다는 증표이리라.

<효>는 부모에의 사랑이고, 존경과 감사, 그리고 공경이다. <효>는 그러나 알게 모르게 더 광범하게 영향권을 형성하고 있다. 부부애와 형제자매의 우의도 부모와의 공경심과 연결돼 있고, 친족관계와 향수도 부모에의 정과 떼어놓기가 어렵다. 더 확대해서는 공동체와 나라에의 충정도 효심과 동질의 정서, 신념을 공유한다고 봐야 한다. 효심이 엷은 사람에게서 진정성 어린 사회관이나 국가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유교가 강조한 삼강오륜은 어찌보면 한 덩어리의 규범이다.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지만, 서로 얽히고설킨 종합적인 윤리도덕성의 당위 개념이다. 효심과 충정이 그렇고, 효심과 부부애, 효심과 사람 존중, 효심과 우정은 어찌 보면 본향이 같다. 효심과 같은 맑은 성질의 심상은 순수하고 열열한 애국심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효심을 깊이 품어보지 않은 메마른 성정의 인품에게서 뜨거운 부부애나 따듯한 우정을 기대하는 일은 나무한테서 물고기를 구하는 꼴은 아닐는지? 공자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염두에 두고 유교를 설계했는지, 그 후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효>를 아우르는 도덕률은 상호작용적이고, 동질성을 띠면서 2천 5백여 년 동안 동양문화권을 이끌었고, 오늘날까지도 세상의 내면에 무시하지 못할 문화적 토양이 돼 있다고 여겨진다.

경기도 수원을 거쳐 효행로를 따라가 화성의 융건릉까지를 다녀보면 곳곳에서 정조(正祖)의 애틋한 효심이 절절히 느껴진다.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부친 사도세자와 모친 혜경궁을 융릉에 안치시킨 일과 배다리를 이용한 성대한 참배 행사, 수원행궁에서의 혜경궁을 위한 환갑잔치, 융건릉에 가까운 수원성 축성 등은 정조의 각별한 효심에서 우러나온 결정체요 문화유산이다. 약관 11살 때 부친 사도세자가 조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한 현장을 목격한 어린 아들의 충격이 지극한 효심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다. 그 순수한 효심이 정조로 하여금 선정을 펴도록 하는 현군의 심성을 심어주었음은 쉽게 짐작이 간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희생을 부른 당쟁(당쟁 외에도 포악한 성격도 원인이라는 기록도 있음)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썼고,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으며,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해 특별한 군사훈련을 시켰고, 수원성을 축조해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유년기에 부친을 여읜 필자는 아버지에게 효도할 기회가 없었다. 부정을 느껴보지도 못했고, 자식의 도리를 전할 길도 없었다. 다만 평생 그리움과, 애석함을 늘 품고 살았다. 당연한 결과로 청상과부가 된 모친은 아들에게 특별한 분일 수밖에 없었고, 모자의 정은 서로 더없이 간절했다. 그런데도 아들의 긴긴 해외생활 때문에 어머니를 가깝게 모시지 못하고 아우에게 부담을 주는 안타까움을 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가장 간절한 부분은 모친이 중한 병환에 시달리실 때 모시고 병원을 다닌 일이다. 직장의 일로 바빠도 매번 새벽에 일어나 멀리 병원에 모시고 가서 길게 늘어선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나눈 모자 간의 대화는 따듯하고 정겨웠다. 중환이라는 의사의 진료를 받았을 때의 낭패감과 호전되었다는 결과를 받는 기쁨은 지금도 눈물겨운 순간들로 생생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써 당혹감을 감추려 했고, 감격은 아들에게로 미루었다. 그럴 때 자식은 감동에 겨워 내색 않고 속으로 마냥 울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은 나의 온 생애에서 드물게 빤짝이는 보석 같은 장면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누구나 이러한 체험을 한 두 가지는 간직하고 있을 것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문화가 변함에 따라 <효>라는 명제도 덩달아 변질되었다. 핵가족 사회가 발전하자 부모에 대한 생각은 훨씬 덜해지고, 농도도 엷어졌다. 자식들은 결혼하자마자 분가하고, 그 제도에 맞게 부모 자식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고 형식화되고 있다. 자식들은 자연히 자기들 부부와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더 치중한다. 예전에는 부모를 위해서라면 최악의 경우 자식도 버릴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지금은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비현실적이다. 자식들을 부모보다 우선하는 경향은 이미 상식화 돼버렸다. 부모들은 미리 알아서 뒤로 물러나야 지각있는 부모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삼강오륜은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다분히 빛바랜 유물이다. 바쁜 세상에서 반드시 지키지는 못할 규범이 돼버린 것이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사회-문화적 가치체계가 달라진 추세는 어쩔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해야 바보스럽지 않다. 그러나 효의 가치에 내재해 있는 인간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이치는 저버릴 수 없는 기본이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과정과 그런 과정에서 쌓이는 정은 어쩌지 못하는 숙명 같은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치더라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이고, 거기서 이뤄지는 관계와 정서는 자연스런 업보이다. 어느 누가 <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다시 <효>를 새김질해야 한다. 전통적인 효도를 고집하자는 것이 아니라 <효>가 내포하고 있는 고귀한 사랑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는 의미이다. 효심 속에 깔려있는 공경의 정신은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이루게 할 것이고, 우정이 쌓이는 교우를 낳게 할 것이며, 건강하고 따듯한 인간관계를 가꾸게 할 것이다. 정치인들도 각박한 정쟁이나 나라의 사유화 같은 삿된 꿈에서 벗어나 진정한 국가 경영의 관점에서 건전한 정치를 지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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