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길 칼럼] 산은 스스로 그러하다
[송장길 칼럼] 산은 스스로 그러하다
  • 송장길(언론인·수필가)
  • 승인 2020.01.14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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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인 겨울산 / 연합뉴스
눈덮인 겨울산 / 연합뉴스

겨울 산에 혼자 올랐다. 집 뒤 광교산 자락이다. 날씨가 춥고 저녁 때라 인적이 끊기고, 새 소리나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적막하다. 산길과 나무들, 바위와 언덕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굳어 있다. 길손이 산을 이리저리 살피며 세세하게 관심을 주는데도 온갖 사물들을 품은 자연은 그저 덤덤하다.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 같은 삼나무들은 헐벗은 채 높이 뻗어 더욱 추워 보이고, 밤나무와 낮으막한 잡목들도 앙상한 가지들 끝에 마른 잎을 한두 개 매달고 찬 공기를 맞고 있다. 유독 소나무들은 상록의 침엽으로 색달리 눈길을 끌지만, 얼어버린 산의 냉기 속에 예외없이 잔뜩 시려 보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은 천편일률로 주검의 갈색을 띠고 수북이 널브러져 있고, 크고 작은 바위와 돌들은 언제나처럼 견고한 모양 그대로이다. 따뜻한 계절에는 푸른 숲을 헤집고 다니며 기척을 내던 다람쥐나 청설모 등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이 길손은 홀로 산에 오르면 언제든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려 한다. 이런저런 질문도 던지고, 스스로 답변도 만들어 받아 본다. 그 대화에는 세상사에서는 미치지 못할 단순함과 순수함이 늘 신선하다. 그러나 모두가 추위에 얼어 있는 이 겨울산에서야 무슨 이야기를 살갑게 주고받겠는가? 억지로 소통을 틀 수는 있겠지만 글쎄, 웬지 선뜻  대면문답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도 위로의 말이나 던져 볼까? 그 때 멀리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며 토해내는 한 올의 울음이 고요한 산에 일필휘지 붓 갈기듯 가는 선을 그으며 지나간다.

갑자기 산길 위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린다. 고요했던 터라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진다. 등산객 한 사람이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잰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의정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접근해 온다. 그는 가까이 와서도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려 한다.  이 산속에 그와 나 둘 뿐인데 본척만척한다는 게 멋적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를 먹음고 인사를 던졌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외마디가 의외였는지 그는 멈칫하면서 “네”라고 급하게 응답하고 서둘러 내려간다. 조금은 두려움에 젖어 있는 듯한 그를 보내고나니 호젓한 산길을 ‘나홀로’ 다니려면 담력을 키워야겠다는 느낌이 스친다.

약관의 13살 중학생 시절, 여름 방학을 틈타 조부모를 뵈러 홀로 길을 나섰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연착이 되어 겨우 세 정거장째인 흑석역에 내리는데 무려 두시간 반이나 걸렸다. 거기서부터는 산을 넘고 개천을 건너 한 시간도 넘게 걸어야 했다.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한 밤길이었다.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니 산속에는 이미 깜깜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숲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소름이 돋았다.

더구나 초등학교에서 횡행하던 귀신 얘기들이 살아나 머리 속을 휘돌며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달걀귀신이 굴러나온다든지, 산발한 여자 귀신이 히히덕거리며 달려든다든지, 골짜기에서 몽달귀신이 자갈을 굴리며 나타난다든지, 애기귀신이 슬피 울며 돌무덤으로 잡아끈다는 등등 무시무시한 잡귀 민화들이다. 무서워서 뒤를 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고, 다리도 후둘거렸다. 귀신이 머리카락을 잡아 끄는 듯한 환각에 휩싸였고, 식은 땀이 속옷을 흠뻑 적셨다. 할머니는 혼비백산, 녹초가 되어 밤중에 찾아든 손자를 보고 안쓰러워서 눈물까지 글썽이셨는데, 할아버지는 대범하게 담력을 키웠다며 긴 담뱃대에 불을 붙이셨다.

며칠 뒤 아침나절 다시 그 길로 돌아오면서 살펴보니 들판과 개울, 산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들에는 파란 벼가 널널하게 펼쳐져 미상불 수채화 같았고, 개울물은 조잘거리며 유리알처럼 맑았으며, 산에는 건강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한껏 너르게 펼쳐내 가다가다 피어있는 앙증맞은 산꽃들과 낙원을 이루고 있었다. 어디에도 귀신 같은 요물이 튀어나올 흉측한 소굴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은 스스로 건실하고 수려한데 그 안에서 인간이 스스로 두려워하고 적대시한 것이다.

자연이 인간들에게 꼭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홍수와 산사태는 가공스러우며, 태풍과 지진은 엄청난 재앙을 안긴다. 가뭄도 견디기 힘들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맹수의 사나움도 극복의 대상이다. 그런 재앙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이 쌓여 문명이 되었고, 과학을 발전시키지 않았나?

꾸역꾸역 올라 용봉에 이르러서 갈래길을 만났고, 나무 벤치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리며 쉬었다. 정면으로 앞에는 군사시설이 있어서 막혀있다. 군사시설의 철망에는 [진입 금지] 표지와 함께 사격장이므로 유탄을 주의하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섬뜩한 느낌이 든다. 아직도 이런 경계가 주민생활 주변 가까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오른쪽은 형제봉과 손곡성지 방향인데, 너무 멀어서 어두어지면 낭패이므로 왼쪽 조광조 묘지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정암 조광조, 조선의 중기 중종시대에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세력의 저항에 희생된 인물의 묘소와 서원이다. 실권을 쥔 지 4년 만에 사약을 받아 급진적 개혁 드라이브의 종언을 맞았다. 그의 개혁청책이 결실을 걷우었다면 조선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조금 더 유연하게 추진했다면 개혁은 성공했을까? 죽이고 죽는 싸움을 벌이는 인간들의 세상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컴컴한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이미 어둠에 싸여있다. 어둠은 나무들과 언덕을 잠식해버리고 형체마저 가리고 있었다. 길손들이 다녀갔든 말든 시커먼 어둠은 무서움을 뿌리며 산을 덮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그 큰 이불을 말끔히 걷우어 가 세상은 다시 밝아질 것이다. 그렇지, 봄이 되면 새 싹들이 일제히 돋아나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질 것이며, 가을에는 단풍이 현란한 풍경을 채색할 것이다. 산은 그렇게 자연의 조화에 순응할 것이고, 자연(自然) 또한 스스로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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