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길 칼럼] 시간 속에서
[송장길 칼럼] 시간 속에서
  • 송장길(언론인·수필가)
  • 승인 2019.11.0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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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흐르는 계곡물 / 연합뉴스
쉼없이 흐르는 계곡물 / 연합뉴스

로스엔젤레스 다운타운을 지나는 10번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다가 노르만디 길로 내려 인근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었다. 저만치에 보이는 고속도로에는 차량들이 양 방향으로 손살 같이 주행하며 시간을 따라잡고 있었고, 주유소 옆 놀만디와 워싱턴 길 위에서도 각종 차량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휘발유는 기름탱크 속으로 쉬~ 소리를 내며 빠르게 쏟아져 들어갔고, 하늘에서는 항공기가 띄엄띄엄 반드럽게 오고가고 있었다. 보도에서는 깔깔거리며 떼 몰려다니는 학생들, 지팡이를 짚고 쩔뚝거리며 길을 건너는 노인,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힘들게 걷는 중년의 유색인 여자, 버스를 놓칠세라 뛰어가는 노동자층 서민들이 저마다 완급으로 흐르고 있었다. 속도는 다르지만 모두가 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고, 시간에 얽매여 있거나 시간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리라.

나 자신도 기름 탱크가 가득 차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짬을 이용해 시계(視界)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뇌리도 이 생각 저 생각을 이어가며 세상 속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심장도 생각과 행동을 따라 쉼 없이 자맥질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 위에서 이뤄지는 움직임들이며, 시간을 따르거나 시간을 머금는 중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에게도 보이지 않게 시간이 입혀진다.

시간은 막무가내다.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전진만을 감행한다. 잠시라도 쉬는 법이 없고, 절대로 돌이키지 않는다. 타협도 없고, 대안도 없다. 어길 수 없는 불가항력의 권력이고, 신의 영역이듯 가깝고도 멀다.

흐르는 물에 비유했던가. 짧은 단위의 시간은 개울물처럼 잔 몸짓으로 속도감 있게 달린다. 그 결에는 인간들의 기쁨과 슬픔이 점철되고, 웃음과 울음이 명멸한다. 긴 단위의 시간은 세월, 또는 역사라는 팻말을 등에 달고 유유히 흐르면서 내면에 가지가지 추억과 삶의 주름, 문화와 갈등의 모자이크를 가득 품고 뒤척이며 멀어져 간다.

시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미래로부터 와서 현재를 작렬시키고 과거에 합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과거에서 나와 현재를 휘돌고는 미래로 뻗어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은 과연 흐르는 것일까? 시간은 개념이다. 흐르는 것은 오히려 시간에 투영되는 사물들이다. 움직이는 것들의 심지를 뽑아 시간이라는 개념을 추출해 놓고, 그 개념으로 거꾸로 사물들을 재단한다.

태양의 빛에 따라 아침과 낮, 저녁과 밤이 찾아들고, 그 연장선에서 계절과 해(年)가 돌며, 그 동선을 잘게 쪼개면 시간이나 시각이다. 그러한 원시적인 시간의 기준을 거쳐 13세기에 이탈리아 밀란의 한 성당에 등장한 소리나는 시계가 시간 개념의 첫 대중적 도구화로 등장했다. 1884년에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을 본초로 지정하여 세계의 표준시로 정하므로서 인류와 세계는 공통의 시간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인간을, 세상을, 더 넓게는 우주를 시간의 눈금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개발한 기계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고 있듯이, 인간들이 설정해 놓은 시간도 인간을 종속물처럼 통제하고 있다. 시계의 경종으로 기상해서 시간에 쫒기며 출근하고, 시간 별로 이어지는 일정에 따라 일하다가 시간의 지시로 퇴근한다. 집안에서도 다시 시간을 재면서 피곤해 한 뒤 시간에 끌려 잠자리에 든다. 그 반복이 현대인의 정형이다. ‘기계화한 인간’, ‘시간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시간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긴 세월 꾸준히 기울여져왔다. 학자들은 당사자들의 심리에 따라서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는 가설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최근에는 미국 표준연구소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원용해 높은 지대나 빠른 속도의 물체 안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느리다는 가설을 실험한 결과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증명한 것으로 보고됐다. 그러나 그것이 원자시계를 동원해 정밀하게 설계된 과학적 실험이라 해도 시간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작은 시도일 뿐이지 무슨 실제적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장수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열망에 비추어 볼 때 지난 한 세기 안에 평균 수명이 거의 20세 이상 길어졌다는 사실이 더 피부에 와 닿을 것이다.

지금 나를 스쳐가는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시간의 프리즘에 비친 나의 삶은 무엇일까? 나는 어려운 수학의 조합적 의미의, 심오한 철학적 의미의, 난해한 미학적 의미의 고답적 해답에 무디다. 다만, 넓고 넓은 세상에서 유유히 굴러가는 거대한 시간의 변방에 위태롭게 달라붙은 하찮은 존재, 부피도 작고 무게도 가벼운 한낱 점급(點級)에 불과한 존재라는 생각에 항용 씁쓸하다. 이마에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더 자주, 더 깊게 시간과의 비례성에 무기력하다는 자각으로 무시로 쓸쓸해진다.

문득 길가의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노파에 시선이 꽂힌다. 주유소로 진입할 때 얼핏 눈에 띄었는데 그 뒷모습이 영락없이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연상케 했었다. 나는 주유를 마치고 운전대에 올랐다가 차를 이동시킨 뒤 다시 내려와 그 노파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주름이 호두껍질처럼 깊고도 무수히 파인 고령의 백인 할머니였다. 몸을 지탱하기도 힘든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꾸부정하게 기대고 먼데를 우두커니 과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의 풍상을 다 겪은 뒤 시간의 뒤안길에서 한눈을 팔고 있는 하릴없는 구경꾼이지 싶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계세요, 어르신?”

“아니”

“추운데 왜 여기 앉아계세요?”

“집 안이 답답해서 구경 나왔어”

“어디 사시는데요”

“저기 길 건너 아파트에”

“댁에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 혼자 가도 돼. 좀 더 있다가 저녁 먹으러 들어갈 꺼야”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자동차로 돌아오면서 노파를 아주 멀리 전송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었을 때는 얼마나 곱고 발랄한 여인이었을까? 풍채로 보아 아마도 예쁘게 차려입고 당당하게 젊음의 빛을 흩뿌리고 다녔을 터이고, 주위의 사랑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아이들 키우랴, 집안 일 하랴, 직장에 다니랴 퍽도 바빴을 것이다. 이제 노파의 시간은 이미 퇴색해버리고, 지금은 눈빛도 흐리고, 기력도 쇠잔해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짐승처럼 보였다. 시간과 함께 세파를 부벼가며 아름다운 생애를 경작해온 그녀에게 시간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까칠한 녹슨 바람 같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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