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회 칼럼] 그해 9월의 기억
[김영회 칼럼] 그해 9월의 기억
  • 김영회(언론인)
  • 승인 2019.09.20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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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영전에 술잔을 올리는 모습. /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영전에 술잔을 올리는 모습. / 연합뉴스

종신 집권 꿈꾼 박정희
군사작전 방불한 날치기
장소 옮겨 공화당 단독 통과
독재 즐겼으나 처참한 최후
기억도 생생한 50년 전 사건

1969년 9월 13일 밤이었습니다. 세종로 1번지 중앙청에서  광화문~남대문을 잇는 대로변 빌딩들은 모두 소등을 한지 오래였지만 태평로 1가 국회의사당만은 환하게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의사당 본회의장에는 며칠 째 농성을 계속하는 야당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있는 상태로 피곤에 지쳐 있었고 기자들이 긴장 속에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의석 앞쪽에서는 김영삼 원내총무가 비장한 얼굴로 “오늘 밤이 D-데이가 틀림없습니다. 국민들이 그토록 반대하는 3선 개헌안을 오늘 밤 통과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를 저지시켜야 합니다”라고 카랑 카랑 목쉰 소리로 외치며 전의를 불태웠습니다.  

밤 12시에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기에 텅 빈 거리는 태풍전야처럼 정적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2시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광화문, 서울 시청일대에 동시에 불이 꺼졌습니다. 뜻밖에 예고 없는 정전이 되자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된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고함을 쳤습니다. “날치기다! 날치기! 3별관이다!”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이던 의원들과 기자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몰려 나가 대로 건너편으로 달려갔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 의원들과 기자들이 3별관에 다다르니 막 투표를 끝낸 공화당의원들이 허둥지둥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날치기 도둑놈들아!”고함소리가 마구 쏟아지는 가운데 번쩍이는 플래시 섬광에 좁은 계단을 뒤엉켜 내려오는 의원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두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들처럼 사색이 된 당황한 표정들이었습니다. 한 순간 여야의원들의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3일 밤을 D-데이로 잡은 공화당 지도부는 소속 의원들을 인근에 있는 반도호텔에 분산, 대기시켰고 새벽 2시30분에 제3별관 3층 회의장으로 집결시켰던 것입니다. 한전에 연락해 국회주변 일대의 전기를 꺼버렸으니 야당인 신민당이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군사행동 뺨치는 완벽한 작전이었습니다.
 
제3별관 3층 특별회의실로 본회의장을 옮긴이들은 촛불을 켜놓고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이효상 의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6차 본회의를 개회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잘 아실 것으로 믿고 투표를 실시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십니까. 이의 없으시면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을 선포 합니다.” 이 의장은 의사봉을 찾다가 탁자에 놓인 주전자가 보이자 얼른 뚜껑을 집어 들고  탁! 탁! 탁! 내려치며 “가결을 선포합니다”하고는 이내 산회를 해버립니다. 개회를 선포한 지 25분 만의 벼락치기 회의였습니다. 

이날 참석자는 공화당, 정우회, 무소속, 대중당 등 122명. 찬성 122, 반대 0표였습니다. 제안 설명도, 토론도 없는 변칙통과였습니다. 군사작전을 방불한 이날의 공화당 단독 날치기 회의는 대한민국 의정사에 또 한 페이지의 ‘흑역사’로 기록됐습니다. 

본 회의장 농성에서 개헌안을 저지시키려다가 허를 찔린 김영삼 총무 등 신민당 의원들은 이내 본청으로 되돌아와 이효상 의장실 집기를 닥치는 대로 마구 부수며 분풀이를 했습니다. 유진오 총재, 서민호 의원은 충격을 받아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이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났다. 공화당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고 울부짖었고 송원영 대변인은 “이는 5・16을 능가하는 쿠데타이다. 우리는 이제 민주제단에 몸을 바칠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국민의 총 궐기를 호소한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날이 밝자 전국의 도시에는 신문 호외가 뿌려졌고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사실 3선 개헌공작은 일찍부터 시작됐습니다. 1962년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7년 제 6대 대통령에 재선된 이후 곧 개헌을 준비했습니다.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북한의 도발 위협 속에서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조국 중흥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며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사무총장 길재호 또한 “북괴의 위협 속에 강력한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투로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에는 “나는 헌법을 고쳐 세 번씩이나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고 연막을 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말이 바뀌면서 조금씩 개헌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개헌이 필요하다면 천천히 국민의 뜻을 모아 논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다시 “국민이 원한다면…”으로 말이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아래서 입을 맞춰 마각(馬脚)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때 이미 한태연, 갈봉근 등 법학자들을 비밀리에 대만에 보내 장기집권 시나리오를 연구하게 했습니다. 당시 대만은 장제스(蔣介石)가 마오쩌동(毛澤東)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피신해와 중화민국의 종신총통으로 독재를 하고 있었기에 박정희에겐 종신집권의 롤모델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정희의 3선 개헌은 임기를 한번 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영구, 종신집권을 꿈꿨던 시나리오였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의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과의 경쟁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상을 깨고 ‘김대중 바람’이 불어 90만표 차이로 어려운 승리를 하자 불안감으로 다음해인 72년 10월 17일 소위 ‘유신(維新)’을 선포합니다. 국회는 해산됐고 대통령 선거는 전국에서 뽑힌 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서울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로 바꾼 것입니다. 

투표율 100%에 찬성 98%의 독재국가식 선거였습니다. 거기다 국회 정원의 3분의1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철두철미한 독재체제였습니다. 해외 언론들이 ‘가짜 민주주의’라고 비판하자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응수하는 해프닝도 보였습니다. 
  
당시 박정희의 과감한 통치력을 인정하는 이들 가운데는 “두 번으로 끝내고 한번 쉬면 다음에는 싫어도 또 하게 될텐데…”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부 여론으로 묻혀 버렸습니다.

3선 개헌에는 야당의 반대뿐 아니라 후계자로 거명되던 JP측근들도 반대했으나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고 정구영 당의장 서리와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의원은 끝까지 반대의사를 관철했습니다. 당연히 변절자들도 있었습니다. 신민당의원들 중 성낙현, 연주흠, 조흥만의원 등 세 사람이 여당의 회유에 휘말려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1969년 9월의 3선 개헌. 그로부터 10년, 박정희는 독재자로서 최고의 영화를 누렸지만 측근의 총에 처참한 최후를 맞았고 한참 뒤 그의 딸 박근혜 역시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나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고 하지만 그때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욕심을 줄이고 3선 개헌이란 실책을 범하지 않았던들 그는 아내 육영수도, 자신도 불행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3선 개헌 50년, 당시의 낡은 취재수첩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날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기에 파편을 주워 모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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