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제라도 '성·젠더' 요소 꼼꼼히 따져 연구개발 혁신 이뤄야"
[인터뷰] "이제라도 '성·젠더' 요소 꼼꼼히 따져 연구개발 혁신 이뤄야"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9.05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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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 이혜숙 수석연구원에게 듣는다
"연구비 더 들고, 기간 길어지더라도 제품·기술 적정성 높여야 생활의 질 향상 "
미국·유럽, 2005년 젠더혁신 개념 도입…연구트렌드 자리잡아

#자동차 충돌실험용 실험 인형(dummy)은 미국에서 1949년에 최초로 개발돼 1997년까지 평균 치수의 남성을 기준으로 한 실험인형을 사용했다. 1980년대에는 아동을 모델로 한 실험 인형을 만들었고, 이후 여성 안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충돌실험용 여성 실험 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남성 실험인형의 크기를 줄여 실험해 충돌사고 발생 시 여성에게 정확히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2011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자동차 충돌실험에서 남성 실험 인형만을 사용하여 차를 생산한 결과, 같은 속도로 달리던 차량에서 사고가 날 경우 남성보다 여성의 목뼈 손상이 더 심하고 부상률도 47% 더 높게 나타났다.

#국제적으로 공공장소의 실내온도는 섭씨 20도다.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평균 70kg 정도의 40대 남성이 쾌적하다고 느끼는 온도에 맞춘 결과다. 그 당시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여성의 사회진출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준은 그대로다.  킹마(Kingma) 교수 연구팀은 사람의 신진대사율은 신체의 크기, 몸무게, 건강 상태, 업무의 종류 등에 따라 다르고 특히 여성의 평균 신진대사율은 남성의 70% 수준으로 섭씨 24도 정도에서 쾌적함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평균 신체인 남성을 결과 값(default)으로 설정해 도출된 실내온도는 여성은 물론 일부 남성들도 불편함을 느낄 수 있고 업무 성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젠더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제품을 개발해 예상치 못한 문제를 불러온 사례다. 최근 20년 전후로 과학 기술 연구 분야서 '과학자의 합리적·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를 무너트린 사례가 속속들이 나타난 가운데, '젠더혁신'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젠더혁신은 과학 기술 연구와 제품 개발에 성·젠더분석을 활용하여 편향성 없는 연구로 연구의 수월성을 제고하고 제품 개발과 치료기술의 적정성을 높여 모든 사람의 생활 질과 편의성을 높이고자 하는 활동이다. 2005년 처음 등장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연구 트렌드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여성과총)은 2016년 2월 과학 기술 연구에서 성과 젠더를 고려하는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해 국내에서도 활발한 젠더혁신 활동을 수행하고자 부설 기관인 젠더혁신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최근 젠더혁신연구센터는 '성과 젠더 요소를 고려한 연구개발 가이드라인: 공학·ICT 융합 분야 가이드라인을 발간했다. 지난해 의·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이드라인을 발간한 데 이어 두 번째로 발간한 가이드라인이다. 

한국여성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 이혜숙 수석연구원이 3일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젠더혁신연구센터 제공
여성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 이혜숙 수석연구원이 3일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젠더혁신연구센터 제공

여성경제신문은 3일 젠더혁신연구센터 이혜숙 수석연구원(71)을 만나 과학 기술계의 젠더혁신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수석은 가이드라인을 발간하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과학 기술에는 개발자의 얼굴, 엔지니어의 얼굴, 투자자의 얼굴, 비즈니스맨의 얼굴이 다 담겨있다. 그동안 과학 기술의 개발 방향과 우선순위를 판단할 의사 결정자들이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에 성·젠더 특성이 반영되지 못 했다. 가이드라인은 성·젠더 특성을 살린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중물"이라고 답했다.  

가이드라인은 학회, 교육 프로그램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련 분야 연구자들에게 배포 중이다. "의외로 많은 연구자가 성(sex)과 젠더(gender)에 대한 개념 이해가 부족해 두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 평등 문제라고만 인식한다. 성 평등과 관련은 있지만 성평등만을 위한 가이드라인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그동안 성·젠더를 고려하지 않았던 연구 관행을 되돌아보고 직접 연구 분야에 적합한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이 수석은 "여태 해왔던 연구가 성·젠더는 물론 인종 요소도 고려해 개발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AI, 머신러닝 등 다양한 기술은 기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현돼서다"라며 최근 나타난 얼굴인식 기술 사례를 들었다. 

미국 표준과학연구원은 시판되는 얼굴인식 기술을 4년마다 평가하는 데 여기서 인종에 따라 인식하는 정확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에서 개발된 얼굴인식 알고리즘은 백인보다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 정확도가 더 높고 미국과 유럽에서 개발된 기술은 백인을 더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발팀에서 선택한 데이터가 알고리즘에 영향을 끼치고 최종 결과물 정확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실제 과학 기술 연구자들은 성·젠더 요소 고려를 하고 있을까?

"많은 연구자가 성과 젠더 특성을 고려한 연구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남성, 수컷만 결과값으로 고려하다 여성을 포함해 연구를 진행하면 연구비가 많이 드는 것은 물론 연구 기간도 길어진다. 예를 들어 수컷만 대상으로 동물 실험을 했던 기존 연구에 암컷도 연구 대상으로 추가한다면 임신, 출산 등 고려해야할 요소가 늘어나고 실험실도 커져야 한다. 성·젠더별 차이를 발견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도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일정 기간 안에 정해진 논문 수를 채워야 하는 연구 성과 평가 방식 아래서는 연구 개발의 관행을 바꾸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연구 관행을 쉽게 바꾸지는 힘들지만, 과학 기술 연구에 있어 '성·젠더 요소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단언했다.

"과학 기술의 가장 큰 미션은 '인류 진보의 기여'다. 모든 성별에 이롭게 적용되는 기술을 만들려면 여성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에겐 불편함을 넘어 때로는 생명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놀라운 건 개발자들이 문제가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못 고치는 것일 뿐 일부러 안 고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수석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 미국의 얼굴 인식 알고리즘의 문제점을 발견한 것도 흑인 여성이다. 개발자나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불편함을 인식해 지적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일반 대중을 위해 과학 기술 관련 생활 밀착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담은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가이드라인은 연구자, 개발자, 연구지원 정책을 만드는 정책 수립자들이 젠더혁신에 공감하기를 바라고 연구 역량을 높이길 바라며 제작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구 방법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연구 분야와 주제마다 성·젠더 요소를 고려해야 할 방법이 달라서다. 구체적인 방법은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직접 찾아야 한다"며 "향후 발간할 가이드라인은 도시개발 등 기존 과학 기술 분야와 ICT가 융합했을 때 성·젠더 이슈들을 다룰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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