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길 칼럼] 메아리 없는 대화, 그리고
[송장길 칼럼] 메아리 없는 대화, 그리고
  • 송장길 (언론인, 수필가)
  • 승인 2019.08.12 1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추석 차례를 마치고 서울근교 공원묘지를 찾은 성묘객들. 사진은 본칼럼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연합뉴스TV캡처
지난해 추석 차례를 마치고 서울근교 추모공원묘을 찾은 성묘객들. 사진은 본칼럼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연합뉴스TV캡처

어찌 그리 되셨어요, 아버지~.

젊디 젊은 연세에 세상을 훌쩍 넘어가시니 떠나신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잖아요. 그 구덩이는 끔찍한 괴물이 되어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다 빨아가고, 기쁨과 즐거움도 송두리채 앗아갔어요.   

연로하신 할머니께서 한여름 뙤약볕에 김을 매시다가 일어나 굽은 허리를 펴시면서 흙 묻은 손등으로 훔치시는 눈가의 물기, 사랑채에서 밤새 해소와 함께 토해내시는 할아버지의 통한, 고요한 밤 바느질 손을 떨구시며 붉히시는 어머니의 눈시울, 그런 것들이 모두 그 구덩이로 빨려들어갔지요. 유복자 막내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저희 형제가 선망하던 상급 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저희들이 아내들을 맞아 곱다고 덕담을 들었을 때도 “애비가 있었다면 ~”하는 할머니의 탄식 한 마디로 기쁨은 모두 그 구덩이에 쳐박혔습니다.       

원망은 아닙니다. 손아래 동생이 꽃망울 같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 곁으로 떠나버렸을 때 “하늘의 뜻이다”라고 더듬거리시던 할아버지의 절제된 절규가 아니라도, 뭇 사연들이 얽힌 운명에 의해 생사도 갈린다는 이치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당시에는 앞선 사업을 일구시느라 너무 무리하셨는지, 더 발빠른 치료는 가능하지 않았는지 하는 의문은 그 자체로도 애를 끊는 아픔이었습니다.     

저는 고작 여섯 살 난 유년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구덩이의 깊이나 넓이를 잘 헤아릴 줄 모르고 집안에 가득한 침잠과 끈적거림이 정말 싫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뽀얗던 손등과 이마에 잔주름이 자글거리기 시작하면서 세월의 덧 없음에 남 몰래 낙담하시는 표정이 곁눈질로 보일 때는 영문도 모를 비애가 치밀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집을 뛰쳐나가 밭두덩이나 개울가 잔디에 주저앉아 먼산 바라기가 되어 부아를 삭이곤 했지요. 그 먼 산 중턱에 아버지의 산소가 반듯하게 자리잡고 있었어요.         

이상하지요? 언제부터인지 산소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아버지께서 묻히신 작은 땅덩어리라는 생각보다 묘소 자체가 저에게 의젓하고 근엄한 형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산소와 서로 위로하듯 마음 속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울쩍할 때나 괴로울 때, 혹은 반가운 일이 생겼을 때는 얼른 산소를 바라보거나 머리 속으로라도 떠올리며 아버지와 자식 간의 정서를 공유했습니다. 오감의 심리적인 변형일까요? 아무튼 괴물스런 구덩이는 날로 작아지고, 산소는 점점 더 크게 보였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졌지요. 세상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집집마다 허둥지둥 피난한다고 난리였습니다. 저희도 덜덜덜 떨면서 조부모님 두 분과 어머니, 저희 형제가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가까이 붙으면서 서둘러 피난길에 합류했었지요. 급한 대로 짐보따리들을 돌돌 싸가지고 들고, 메고 기약 없이 떠나는 행렬에서 저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생사가 갈릴 지도 모를 불안에 싸여 물오리떼처럼 멀어져 가는 우리 가족을 내려다 보며 산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피난지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뒤 전황이 바뀌었다는 감격스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국군의 수복을 따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산길로 들길로 백 여리를 걸어 동구에 다달았을 때 는개에 싸인 아버지 산소가 멀리 가물거렸습니다. 어찌나 반가운지 심장이 요동을 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 저는 산소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습니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는 용기를, 기쁠 때는 자제를, 느슨해졌을 때는 분발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더욱 소중한 것은 한 생명의 자리가 비워지면 그렇게 큰 구덩이가 파이는 것이고, 그렇다면 한 사람 한 사람 대하기가 얼마나 무거운 일인 지를 깨우쳐 준 것입니다.

어느 해 가을 늦은 저녁에 서울에서 아우가 로스앤젤스의 나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아우가 멈칫거리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아버지 다비 모시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그게 좋겠어요 나중을 생각해서라두요”      

나는 한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산 임자의 눈치도 부담스럽고, 모든 것이 너무 번거로워요”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해외에 오래 살고 있어서 아버지를 생전에 한 번도 뵙지 못한 유복자 동생에게 성묘며, 벌초며를 다 맡겨왔던 자책감이 무지근하게 치밀었다.           

“요즈음 추세가 다 그래요. 다음 세대에는 더욱 그럴 거구요”  

“그래도 그렇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혼백은 벽제 어머니 곁에 모실라고 해요”            

아버지를 어머니 옆에 모신다는 말에 나는 녹아버렸다. 두 분이 새파랗게 젊은 시절에 헤어진 뒤 얼마 만의 해후인가. 80평생 아버지를 그리며, 명주실 같다는 평판을 듣고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닌가.     

“준비는 다 됐어요. 일 할 사람들도 약속이 잘 됐구요” 추인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냐? 수고가 많았구나. 그러면 정중히, 그리고 지성껏이나 모시거라. 구덩이도 잘 메우고~”        

“걱정하지 마세요. 못 오시는 사정은 아버지께 잘 고할께요. 다비 모신 다음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게세요”     

나는 아직 전화기를 들고 있었지만, 저쪽에서 먼저 끊어지는 소리가 딸칵하고 들렸다.         

뭉근해진 심장을 누르며 한 동안을 서성이다가 후닥탁 집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무어라고 들렸으나 허공에다 고개만 끄덕여 주고 바삐 걸었다. 거리는 어둑어둑 저물었고, 시야는 흐릿했다. 머리 속이 띵하다고 느끼면서 속보로 인근 공원에 이르렀다.   

공원에는 인적이 끊기고, 희미한 달빛에 낮익은 고목들이 묵묵히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 여기저기에 산소가 환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스산한 바람이 희끗희끗한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날렸다.           

공원 잔디밭 귀퉁이에 짐승처럼 서서 나는 태평양 쪽 고향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폐부가 뻑뻑해져옴을 느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별들이  죽은 이들의 눈알이듯 무수히 껌뻑거리고 있었다.  

절을 했다. 두 번 하고 나서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절을 했다. 누르고 누르던 가슴 속 응어리가 급기야 목구멍으로 복바쳐 나올 때까지 절을 했다. 그리고 폭 꼬꾸라져 흐느꼈다. 오래 오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