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길 칼럼] 이기적인 사회와 아름다운 동행
[송장길 칼럼] 이기적인 사회와 아름다운 동행
  • 송장길(언론인, 수필가)
  • 승인 2019.03.1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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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3월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던 중 정부가 북한의 대변인이라는 식의 발언을 하자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석으로 나가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연합뉴스

서울역이나 강남역, 양재역 등에 출퇴근 시간이 되면 직장인들의 행진이 강물처럼 흐른다. 활기도 넘치고, 눈빛도 번득인다. 옷 매무새도 세련돼 보이고, 걸음도 빠르다. 몰려가는 그들 속에 합류하면 스스로도 어느덧 그들이 돼 있다. 자연히 보조도 맞춰지고, 걸음걸이도 비슷해진다.

그런데 종종 발길이 멈칫하고 리듬을 잃을 때가 있다. 옆에서 갑자기 끼어들어 진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개찰구에 거의 도착해 교통카드를 주머니에서 빼고 있는 순간, 그 틈으로 파고들어 비호처럼 카드를 찍고 나가는 날쎈돌이가 있어 당황케 한다.

물론 바쁜 젊은이들에게는 연로한 이들의 다소 느린 거동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행렬을 크게 지체시킬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작은 방해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상처가 되지 않는가.

전차 안에 들어서면 자리잡기로 신경전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자리를 찾아 허둥대기도 한다. 물론 노약자나 어린이, 임신부가 앉을 자리를 찾는 일이야 자연스럽고, 주변에서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멀정하면서도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안달하는 꼴은 체신머리가 없다. 더구나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 무슨 이익이라도 차지하려는 양 혈안이 되어 기웃거리는 모양은 보기가 좋지 않다. 그런 행동거지가 습관화된 이기주의처럼 보일 때는 역겨워지기도 한다.

한번은 멀리 조카네 치과에서 잇몸 수술을 하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일산에서 번잡한 3호선을 타고 안국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앞자리가 나서 피곤하던 차에 앉으려는 순간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50대 여인이 내 앞 자리로 얼른 옮겨 앉았다. 자기 앞에 서 있던 동행을 앉히려고 한 행동이었다. 나는 할일없이 무거운 심신을 달래며 다른 쪽으로 멀찍이 가서 부은 발등으로 계속 버티고 서서 핸드폰만을 줄곧 들여다 보았다.

엊그제 아내가 외출했다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왔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옆에서 60대 여자 세명이 동창생들의 흉을 보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아내의 앞 자리가 비자 막 앉으려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모자를 빈 자리에 턱 던져놓은 뒤 친구를 불렀다. 아내는 순간 참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그 모자를 집어 건네면서 자리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안 보이냐, 요새도 이렇게 자리를 잡느냐고 점잖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자기 친구들을 향해 오늘 망신을 당했다면서 재수 없는 날이라는 투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게 재수없는 날로 여길 일인가?

앞의 사례들은 대범하게 넘길 수도 있는 작은 티끌들이다. 또 이런 미양들과는 달리 이 사회에는 예의 바르고 건전한 시민의식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중의 흠결이 사시로 세상을 보지 않는 보통인의 눈을 자꾸 찌프리게 하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는 징조이다.

필자는 평균인이다. 특별한 학문을 이룩하지도 못했고, 고급 기술도 없다. 부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궁핍하지도 않다. 뛰어난 용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혐오감을 줄 정도는 아니다. 적당히 교육도 받았고, 그럭저럭 사회활동에도 종사했다. 이해심을 갖자고 노력하고 있고, 긍정의 힘도 알고 있다. 이런 보통 인간에게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함을 계속 안겨주는 사회는 고칠 점이 많은 사회임에 틀림없다.

한국어에 ‘실례합니다’라는 좋은 말이 있다. 남을 존중하며 양해를 구하는 전령 같은 언어이다. 그런데 이 유용한 말이 어딘가에 갇혀 세상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친다면 양해를 구해야 하고, 양해가 없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 충돌과 갈등이 적다. 영어권에서는 “Excuse me”가 생활 속에서 감초처럼 쓰인다. 조금만 신경이 쓰일 눈치면 총알처럼 이말이 튀어나온다. 행인의 옆을 가까이 지나가거나 질러갈 때도 어김없이 양해를 구한다. 남에게 위협이 되는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봄비가 추저추적 내리는 오후 우산을 쓰고 미국 대사관 뒤에서 길을 건너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갑자기 달려와 내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너무 놀래서 얼떨결에 우산으로 택시의 트렁크 위를 두드렸다. 택시가 급정거를 하더니 유리창을 내리고 쏘아보았다. 내가 “조심해서 다녀~. 사람을 칠 뻔했잖아!”라고 쏘아부쳤더니 상대방에게서 듣기 거북한 험악한 욕찌거리가 돌아왔다. 내가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로 뒤 범퍼를 찍자 택시는 그대로 달아났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행인이 지나가고 있는데 위험하게 운전해 지나가는 경우는 흔히 당하는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행인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게 도로상의 예법이며, 행인을 위협하며 달려가는 차량은 무모한 운전(reckless drive)으로 몰려 불이익을 당한다.

주말에 장보는 사람들이 몰리는 대형 마트에 가면 무질서하기가 이를 데 없다. 카트를 비켜 다니기조차 쉽지 않다. 저런 무질서 속에서 나름의 질서가 유지되니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남이야 어찌되든 자기만 뚫고나가 일을 보면 된다는 이기심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이런 이기심은 언뜻 대수롭지 않게 치부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게 세상의 돌아가는 원리에 무서운 암적 요인이다. 개인들의 마음 안에 잠재한 독소들은 사회의 근저에 갈아앉아 뭉쳐 있다가 기회가 오면 많은 문제들을 치올리곤 한다. 주민들이나 압력단체, 사회기관의 집단 이기주의로도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극명하게 이기주의를 껴안고 그에 천착하고 있는 조직이 정당이다. 정당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가차없이 들추어내서 악랄하게 공격한다. 오죽하면 한국의 정치는 전쟁 중이라는 비유가 나도는가.

민주당이 한국당의 원내대표 연설 도중에 야유와 비난을 연창해 집단으로 방해하고, 원내대표단이 의장석으로 올라가 연설을 중단시킨 행동은 한국 의정사에 오점을 남겼다. 또 외국 보도를 캡쳐해서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의 대변인이 되지 말아달라고 한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 징계안까지 제출한 행위는 토론장으로서의 의회 기능에 먹칠을 한 꼴이며, 아무리 아팠더라도 긁어 부스럼 만들기였다.

한국당이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의 패스트 트랙 움직임에 의원직 총사퇴로 대응하는 전략도 미숙하다. 국회가 타협의 장인 만큼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논의는 계속 진행해야 된다. 숨은 의도가 보이면 꼼짝 못하게  제압할 묘수를 찾아내야 한다. 물리적으로 강행한다면 그때 실력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표결로는 현실적으로 통과가 불투명하지 않은가.

정당은 철저히 이기적인 당리당략에만 올인하고있다. 국민의 의사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국민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는 정당의 존재 이유 자체도 무시하는 현실이 오늘날 한국 정당들과 정치의 민낯이다.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도 타인 존중과 시혜, 사랑이었다.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싯달다는 자비를 설파했으며, 공자는 어짊을 강조하지 않았나.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므로 서로 존중하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이치를 벗어나면 삐걱댄다는 원리는 기본적이다. 그래서 공생의 메카니즘이 세련되면 될수록 선진사회이다.

오늘 한국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깨달아야 할 명제 중의 하나는 단연 타인 존중과 배려이다. 나의 행위가 타인에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늘 우선으로 생각할 때 아름다운 동행은 이뤄지고, 즐거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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