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미 작가 "동두천 기지촌 치열한 여성의 삶 기억돼야 합니다"
김중미 작가 "동두천 기지촌 치열한 여성의 삶 기억돼야 합니다"
  • 문인영 기자
  • 승인 2018.09.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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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의 동두천' 토크 콘서트 열어..."음지 속 사람들 돌아보는 계기되는 소중한 장소"
김중미 작가가 14일 서울 마포구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장편소설 '나의 동두천' 토크 콘서트에서 이야기를 하고있다. 김중미 작가는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저자다. /문인영 기자 photoiym@gmail.com

“2층 전시장에 마련된 하얀 비닐들 사이를 걸을 수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나오는 문을 못 찾을 정도였어요. 집창촌, 그곳에서 여성들이 느꼈던 마음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생각해요.”

김중미 작가가 14일 서울 마포구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소설 ‘나의 동두천’ 토크 콘서트에서 ‘성매매집결지 100년의 아카이빙' 특별전 감상 소감을 밝혔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저자로 유명한 그는 지난 5월 ‘나의 동두천’을 출간했다. 

전날인 13일부터 열린 특별전에서는 지도와 신문, 사진자료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성매매집결지의 생성과 변천사, 성매매 방지 관련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토크 콘서트에 앞서 특별전을 둘러본 김 작가는 성매매집결지였던 동두천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때는 뭔지도 모른 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만 바라본 것이, 동두천을 떠나고 나서 내 안의 그림자로 자리 잡았어요. 부모님이 성매매에 관련된 일을 하신 것도 아닌데 동두천에 살았다는 것을 말하면 안 되는 분위기였죠.” 

그는 중학교 2학년때까지 동두천에서 살았다. 동두천을 떠나고 40대가 되어갈 때 즈음 작가가 되었고, 첫 번째 책을 기다리면서 김 작가는 생각을 바꿨다.

“'동두천은 나의 바탕이고 뿌리구나.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나를 움직이게 하는구나.' 이걸 넘어가지 않고는 앞으로 글을 쓸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라며 책을 펴낸 의도를 밝혔다.

소설 '나의 동두천'은 1980년 중반 인천으로 이사와 살고있는 정원이가 자신이 15살까지 살았던 동두천을 26년 만에 찾아보며 친구들의 삶을 떠올리며 시작된다. 미군 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미국으로 입양 간 경숙이, 진학을 포기하고 미용을 배우던 해자, 미군 클럽에 나가는 양색시 미자언니와 흑인 아이를 낳고 집을 떠난 윤희언니, 혼혈로 태어나 차별 속에 살아야 했던 재민이 등이 등장한다. 

동두천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며 여전히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김중미 작가가 14일 서울 마포구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장편소설 '나의 동두천' 토크 콘서트에서 이야기를 하고있다. 김중미 작가는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저자다. /문인영 기자 photoiym@gmail.com

“학교에 혼혈 아이들이 많았어요. 초등학교때는 아빠가 미군이거나 외국인이었던 친구들은 강제로 입양가는 경우도 있었죠. 어느날 '나 입양가' 가볍게 말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들은 엄마랑 살고 싶어도 입양을 가야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미국으로 가서 살면 좋지 했다'가 그 친구가 '나 영어 모르는데?' 이렇게 툭 내던지는게 너무 마음에 남았죠.“

어린 시절의 기억뿐만 아니라 직접 동두천을 방문해 그가 살던 옛집을 찾아보던 중 겪은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공사를 하고 있었어요. 시멘트랑 모래를 개거나 하는건 기술 없는 사람들이 보통하죠. 한 사람을 봤는데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백인 혼혈이었어요. 그 순간 ‘내 초등학교친구였던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이 들었죠.“ 

이 일은 소설에 혼혈로 등장하는 조재민 이라는 인물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김 작가는 대한민국이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는 기지촌도 꼭 기억해야할 장소라도 말했다.

“기지촌의 모습은 남아있으면 좋겠어요. 한국 전쟁 이후 경제개발시기에 국가가 기지촌에 떠맡겼던 역할이 있잖아요. 밖의 사람들은 눈길도 주기 싫었던 그곳이 우리가 지금을 버티는 토대였을 수도 있어요. 그걸 기억하고 부채의식을 갖게끔 그대로 놔뒀으면 좋겠어요. 저는 거기서 성장했기 때문에 추억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잖아요. '그게 뭐 추억할 곳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곳에서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에 대해서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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