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8.9.19 수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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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이니셜 'En' 'N' 놓고 고민···고은 시 교과서 빼는것 반대"'서울시 성평등 대상' 수상..."아직 괴물 주니어 넘쳐...미투운동 더 전진해야"
'미투운동'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영미 시인이 3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윤준병 서울시 행정1부시장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있다.

국내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하는데 기여한 최영미(57) 시인이 "처음 '괴물'을 썼을 때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라며 "본문의 'En'을 'En'으로 쓸지 'N'으로 쓸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고, 결국 'En'을 택했다"고 밝혔다. 정작 시는 술술 써내려갔지만 세상에 내보내기 직전 이니셜 때문에 그도 잠시 멈칫한 것이다. 

3일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을 받은 최 시인은 서울시청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시 한 편으로 시끄러워졌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가 변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며 한국 사회가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다"며 '더 깊은 변화'를 기대했다.

원로 시인 고은의 상습 성추행을 폭로한 '괴물'은 최 시인이 지난해 9월 인문교양 계간지 '황해문화'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쓴 세 편의 시 중 하나다. 당시는 미국에서도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전이었다.

시 '괴물'은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 Me too /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시에 등장하는 이니셜을 고민 끝에 'N'이 아닌 'En'으로 결정한 뒤 친구들 앞에서 시를 암송하며 발표해도 좋을지 의사를 물었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발표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괴물'은 지난해 12월 발표됐고 올해 2월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으며 국내에서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촉매제가 됐다.

최 시인은 "너무 늦게 써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시를 썼다"며 "10년 전에 써서 (문단 성폭력 문제를) 청소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등단할 무렵에는 여성 시인을 기인 취급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지금은 조금 나아졌겠지만, 아직 '괴물 주니어'들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괴물'을 몇십 년간 방치하며 그를 흠모한 남성 문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최 시인은 고은 시인의 시를 굳이 교과서에서 뺄 필요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그의 시가 생명력이 있다면 교과서에서 빼든 안 빼든 살아남을 것이다"라며 "오로지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라고 했다.

'미투운동'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영미 시인이 3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그는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추가 폭로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최 시인은 "괴물과 싸운 것만 해도 힘에 부친다"며 "지난 2월 언론 인터뷰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열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은 경고성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여성들에 대한 공공연한 성추행과 성폭력을 묵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됐기 때문에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필요는 없다"며 "반성해야 할 분들은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문단내 성평등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성평등을 이루려면 대부분이 남성인 문학상 심사위원을 여성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최 시인의 견해다. 문화예술계 권력을 여성에게도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성을 팔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미투 운동이 더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악습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며 "당분간 조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니, 미투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보수적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올해 하반기 SNS에 쓴 글을 모아 산문집을 한 권 낼 예정이다.

그는 "시인은 시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한 적이 거의 없었다. 40대 이후로는 힘든 일이 많아 시를 접을까도 생각했다"며 "끝끝내 시를 놓지 않은 게 다행이다"라고 했다.

여성에게만 암묵적으로 강요된 미적 기준을 벗어 버리자는 '탈 코르셋' 운동에 대해선 "자연스럽게 살자는 데 어느 정도 찬성한다"며 "면접시험을 앞두고 성형수술을 한다든지 중고등학생부터 화장하는 문화는 없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 시인은 "치마를 입지 말자는 '탈 코르셋' 목소리도 있기에 오늘 치마를 입고 나올지 말지 고민했다"며 "그런데 나이가 드니 치마가 편하다. 각자 편한 '탈 코르셋'을 추구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밝혔다.

서울시 성평등상 수상에 대해 최 시인은 "제 개인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자신의 아픈 목소리를 세상에 알린 모든 여성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며 "미투를 지지해주신 분들께 감사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일상이 몇 달간 깨진 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들이 있다"며 '말희' '명자' '윤주' 등 고마운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꺼내놓으며 웃었다.

윤아름 기자  aruumi@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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