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회 칼럼] 정치는 '허업'
[김영회 칼럼] 정치는 '허업'
  • 김영회(언론인)
  • 승인 2018.06.2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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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영정을 든 손자가 27일 오전 서울 중구 고인의 청구동 자택 서재를 지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타다 남은 장작이 되기 싫었던 JP. 하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그의 죽음. 정치가 허업이듯 인생 또한 허업입니다―

20세기 후반 한국정치사를 풍미(風靡)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줌의 재가 되어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산기슭에, 2015년 먼저 세상을 떠나 잠들어 있는 아내 박영옥 여사 곁에 안치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미 권력으로부터는 멀어진지 오래지만 그의 죽음은 ‘3김’이라는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상징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JP라고 부르지만 본래 그의 아호는 운정(雲庭)입니다. 운정은 ‘구름 속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낭만은 있으되 현실성이 없으니 그가 풍류를 즐긴 풍운아의 삶을 산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신문·방송들은 예의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해 마치 밤하늘의 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앞다퉈 호들갑을 떱니다. 사실 JP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처삼촌인 박정희 소장과 함께 벌인 5·16군사쿠데타 때입니다. 

당시 그는 예비역 중령의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한 해전 일어난 4·19혁명 뒤 부패한 군을 ‘정풍(整風)’해야 한다면서 일어난 젊은 장교 중 주동자가 바로 김종필 중령이었습니다. 세칭 ‘하극상 사건’으로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군복을 벗었고 50여년에 걸친 그의 고달픈 정치적 삶은 시작됩니다.

군에서 쫓겨난 그는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눈 덮인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며 혼자 울분을 삭이기도 했고, 이력서를 써들고 ‘사상계’사로 장준하 선생을 찾아가 취직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상계는 깨어 있는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고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선생은 항일독립투사로 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어른’이었습니다. 행적으로 보아 당시 JP는 진보적인 젊은이였음이 분명합니다. 보수의 아이콘이 된 후반생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5·16 뒤 JP에게는 ‘2인자’라는 수식어가 별칭으로 따라 붙었지만 사실 2인자는 아니었습니다. 육사 8기생의 리더로, 박정희의 조카사위로 5·16쿠데타를 모의한 것은 맞지만 거사가 성공한 뒤 후계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락을 중심으로 한 실세들이 박 대통령을 에워싸고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JP는 단지 권력의 중심에는 있었으되 핵심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권력의 외곽을 맴돌았을 뿐이었던 속칭 2인자였습니다.

JP는 1926년생으로 부여에서 태어나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군문에 들어갑니다. 그가 5·16쿠데타에 참여한 것은 35세이던 1961년입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아홉 차례 연이어 당선했고, 공화당 당의장을 거쳐 45세이던 1971년, 그리고 72세이던 1998년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합니다.

언론은 JP의 일생을 파란만장하다고 합니다.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끊임없이 눈총을 받았고 그의 심복들로부터 수없는 견제를 당했습니다. 박 대통령 시해 뒤에는 새카만 후배인 전두환 군부세력으로 부터 부정축재자라는 낙인이 찍혀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JP는 일반 국민에게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2차 외유에서 돌아와 서울시내 한곳에서 JC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둘이 만나면 멱살을 잡고, 셋이 모이면 둘이 한사람 바보 만들고, 넷이 만나면 둘씩 편을 갈라 싸운다”면서 “국민들이 그런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사자후를 토해냅니다. 장내를 메운 젊은이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열광했습니다. 그는 ‘혁명가’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시와 서화를 좋아해 그때마다 역사적인 일화를 통해 현실정치를 에둘러 질타하곤 했습니다. 아마추어 화가들을 모아 ‘일요화가회’를 창립해 예술인들과 어울리는 일로 문화를 아는 정치인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멋진 남자’로 소문이 나 문화·연예계 등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한 자질의 소유자였습니다. 특히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해 그때 마다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의 명언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1993년 3당 합당으로 YS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의 주인이 되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겨 관계가 서먹할 때가 있었습니다.

JP는 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고개를 숙입니다. 그때 한 말이 유명한 “연작이 홍곡의 대지를 어찌 촌탁(忖度)하오리까”입니다. 연작(燕雀)이란 제비와 참새요, 홍곡(鴻鵠)이란 기러기와 고니를 일컬음이니 “하찮은 소인이 어찌 대인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사기(史記)’의 고사를 인용, 납작 엎드림으로써 오해를 풀었습니다. 정가에서는 “역시 JP답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JP는 1971년 펴낸 에세이집 ‘J.P칼럼’의 ‘활활 타는 내일을’에서 “어느 시인은 아낌없이 타라. 타서 재가 되라. 타다 남은 토막나무처럼 추악함이 없느니…라고 했는데 나는 인생이란, 타야할 때 완전 연소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그 향생(享生)의 가치가 평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완전연소의 그 적시(適時)를 옳게 붙잡는 일이란 연소 자체보다도 더욱 어려운 것이고 보면 짧은 인생인데도 그 고뇌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타다 남은 토막나무처럼 뒹굴고 있는 현재의 나를 가만히 자성해 본다”고 술회했습니다.

활활 타는 장작처럼 자신의 꿈을 불태우고 싶었던 그였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한탄했던 것입니다. 두 해전 이미 3선 개헌안이 한밤중 공화당에 의해 국회를 통과했고 박정희의 종신집권법인 ‘10월 유신’의 선포를 코앞에 둔 때였기에 뒷말이 많았습니다.

한 사람의 정치 인생에는 공과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JP가 눈을 감자 사람들은 이구동성 그의 삶을 미화하고 있지만 비판론자들은 혹독한 평가를 서슴지 않습니다.

먼저 군사 쿠데타에 참여해 합법적인 민주정부를 와해시켰다는 점,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수많은 정치인, 민주인사, 학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행적을 비판합니다. 1969년 9월 3선개헌에서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끝내 손을 들어 찬성해줬고 유신체제에서도 정치일선에서 영화를 누렸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 그는 김영삼, 김대중처럼 독재와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한 일도 없습니다.

JP는 두 차례의 외유를 합니다. 첫 번째는 1963년 2월25일 공화당 창당사전조직이 문제가 돼 주도세력과의 불화로, 2차 외유는 1964년 6월 18일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의혹으로 7개월의 떠돌이 생활을 겪습니다. 본인의 의도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이라는 말이 이때 유행어가 됐습니다.

고인은 생전에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허업이라면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다르지 아니한 것일 터인즉, 역시 그 다운 표현입니다. 아마도 권력을 손에서 놓았을 때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쉬운 것은 권력을 쥐고 있었을 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오, 아니, 눈을 감기 전 정치가 허업이 아니라 ‘인생이 허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오호라,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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