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7.10.22 일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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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회 칼럼] 수상한 세월
이명박 정부 시절 민간인을 동원한 국가정보원 '댓글 부대'를 운영한 혐의를 받는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이 지난 1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민 전 단장은 구속됐다. /양문숙 기자 photoyms@seoulmedia.co.kr

―시국이 매우 위중합니다. 지각을 울리는 핵실험 소리, 창공을 뒤덮는 첨단전폭기들. 지금 전쟁의 음습한 공기가 온 나라에 가득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해주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잘 익은 포도송이에 감미로움이 더 깃들게 해주소서.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바람이 불어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이리 저리 가로수 길을 헤매 일 것입니다."

고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오스트리아 1875~1926)는 그의 시 ‘가을 날’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의 순수한 영혼을 그린 릴케는 독일어권의 문학가 중 당대 으뜸으로 평가 받은 시인 중 한사람입니다. 기혼녀 루 살로메와 영혼을 교감했던 릴케는 사랑과 고독과 밤과 죽음에 대하여 2000편이 넘는 시로 독일 현대시를 완성시켰습니다.

릴케는 한 귀부인에게 장미꽃을 꺾어주다가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풍문에 휘말렸지만 사실은 백혈병으로 숨졌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의 묘비에는 생전에 직접 쓴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라는 시가 쓰여있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가을이 한창입니다. 산과 들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황금벌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장마철임에도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폭염과 한발(旱魃)로 애를 태우더니 끝내는 집중폭우가 쏟아져 또 물난리로 수해를 입었습니다.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태풍만 몰려오지 않는다면 올 농사는 그런대로 풍년이 들 것입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니 미상불(未嘗不), 계절은 이때가 일 년 중 가장 좋은 때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빠져 시국이 매우 위중합니다. 한가위를 전후해 때는 좋은 시절이 분명하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태풍전야와 같은 긴장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각을 울리는 북한의 잇따르는 핵실험과 화염을 내 뿜으며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는 미사일, 굉음을 내며 하늘을 뒤덮는 미국의 최첨단 전폭기 편대들,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는 험악한 ‘말싸움’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마저 갖게 합니다.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북·미간 일촉즉발의 대치는 마치 양쪽에서 기관차가 마주 보고 달리는 바로 그런 긴박한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예정된 수순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국내사정은 어떻습니까. 고고도미사일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군민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사드를 반대하는 중국의 보복으로 한국기업들이 철수를 서두르는 가운데 국내관광업계가 파리를 날리며 한숨만 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잖아도 회복되지 않는 경제상황에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가 수조원에 달하는 심각한 지경입니다.

소문만 무성하던 국정원의 댓글파동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습니다. 국가의 자부심이어야 할 최고 정보기관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선거에 개입을 한 정황이 만천하에 들어나니 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입니까. KBS, MBC 두 공영방송의 기자, PD 등 4000여명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경영책임자들의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지, 벌써 며칠입니까. 어린 여중생들의 폭력 또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한껏 순진무구해야할 나 어린소녀들이 어쩌다가 이런 폭력에 물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와중(渦中)에 백년하청(百年河淸)으로 정쟁을 벌이는 정치권의 행태도 국민들을 더 더욱 짜증나게 합니다. 인사청문회를 둘러싸고 여야가 벌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는 조선시대 정쟁의 뺨을 치게 할 만큼 정치의 후진성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 못할 것은 북한의 속셈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끝장을 보려고 이렇게 ‘강대 강’으로 맞서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핵과 미사일개발에 성공했다고 하나 인구 2528만명, GDP(국가총생산) 503억 달러, 세계 94위의 허약한 경제력으로 인구 3억2.00만명, GDP 18조1247억 달러의 세계 1위 초강대국인 미국과 어떻게 싸우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뿐인가. 미국의 뒤에는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일본이, 또 한국이 또 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 첨단무기를 공급하는 ‘군수공장’입니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가 7000개라는데 이제 겨우 10여개의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맞장을 뜨려고 한다? 물론 전쟁이 나면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편을 들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당하고 무모한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뭘 모르는 하루 강아지,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며칠전 미국의 뉴스채널 CNN이 북한 현지에서 취재한 특집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미국을 향해 목청을 높여 “왜, 우리 조선을 못 살게 구느냐”면서 “미국 놈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이구동성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국민들이 하나로 단합해 결의를 보이는 건 좋을지 모르지만 국력과 첨단무기의 싸움인 현대전에서 증오심만으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북한은 무모한 도전을 멈춰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미국에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쫓을 때 빠져 나갈 구멍을 보고 쫓아야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제재와 압박을 넘어 힘으로 해결하려는 군사적 옵션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부릅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얻은 게 없습니다. 얻기는 커녕 세계의 골칫거리가 된 IS테러만 불러 왔습니다.

골치 아프지만 평화를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힘으로 누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닙니다. “성(城)을 공격하는 것은 하지하(下之下)의 병법이요, 그 으뜸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지상(上之上)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럽선진국의 사관학교에서도 교본으로 쓴다는 천하 명저(名著), 손자병법의 내용 중 첫 손가락에 꼽는 전략입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북한은 크게 다치기 전에 도발을 중지해야 합니다. 나아가는 것도 때가 있고 물러서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지금 필요한 것은 국론의 통합입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여야를 불문하고 하나로 뜻을 모아야 합니다. 여당과 야당, 국민이 하나가 되어 어려움에 대처할 때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불이 났는데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네 탓 타령’만 하다가는 집을 전소시킵니다.

 지난 시절 식량이 모자라 배를 주리던 가난한 시절에도 가을이 오면 릴케의 시를 읊으며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남아도는 이 좋은 가을 날 전쟁의 음습한 공기가 나라에 가득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영회(언론인)  yhk9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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