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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회 칼럼] 영부인 열전
역대 대통령 영부인들. 왼쪽부터 프란체스카, 공덕귀, 육영수, 홍기, 이순자, 김옥숙, 손명순, 이희호, 권양숙, 김윤옥, 김정숙 여사. 

―대통령과 영욕을 함께하는 청와대의 ‘안방마님’들. 남편의 정치적 공과와 행동거지로 평가를 받는 영욕이 점철되는 사람, 영부인―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오스트리아 여성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를 만난 것은 1933년 2월 스위스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였습니다. 이 박사는 그곳에서 열렸던 국제회의에 일본의 야욕과 한국의 자주독립을 각국 대표들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미국에서 와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여행 중이던 프란체스카의 테이블에 함께 앉게 된 것이 인연이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된 두 사람은 사랑을 꽃 피워 1934년 뉴욕의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두 사람의 결혼에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이 박사에게는 고국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데다 상대가 서양여자라고 해서 독립운동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이 심했고 프란체스카 역시 어머니의 반대가 대단했습니다.

더욱이 이 박사는 59세, 초로(初老)의 나이였고 프란체스카 또한 결혼 경력이 있는 34세의 이혼녀였습니다. 나이 또한 25살의 차이이니 한국식 사고로 보면 아버지와 딸 격이라서 주변의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가난한 나라의 독립운동가를 헌신적으로 도왔고 아내 겸 비서역할로 이 박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당시 동포사회에서는 서양여자라는데 대한 거부반응으로 프란체스카를 여사라 부르지 않고 ‘호주댁’으로 불렀습니다. ‘호주댁’이란 교포들이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호주)를 구분하지 못하고 착각한데서 온 오류였는데 그 호칭은 나이가 들 때 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것을 안 이 박사는 이금순, 이부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프란체스카에게 지어주었습니다.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내외는 1945년 10월 귀국하여 이 박사가 1948년 5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어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경무대에 함께 들어가 1960년 4·19혁명 때 까지 12년 동안 영광된 삶을 누립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의 안주인으로 있는 동안 대통령 측근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않고 비서들에게 “영어로 말하라”고 하는가하면 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참견하면서 보좌관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습니다. 프란체스카는 이 대통령이 임영신 상공장관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을 듣고는 곧장 압력을 넣어 장관직에서 해임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평가는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사가 처음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이가 73세, 하야하던 1960년에는 85세의 연로한 나이였기에 대통령의 업무 상당 부분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의장막’에 가려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당연히 정치가 비정상이 되었고 급기야 4·19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불러 오고야 만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내려 와 5월 29일 새벽  안개 속에 망명길에 올라 하와이로 갔지만 일정한 거처도 없이 동포들이 마련해준 집을 옮겨 다니며 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1965년 7월 19일 이 대통령이 요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자 프란체스카는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갑니다. 동생, 언니 집 등을 전전하던 그녀는 박정희 정부의 배려로 1970년 한국에 돌아 와 옛 사저인 이화장에서 양자인 이인수 씨의 보살핌 속에 동작동 국립묘지 이 전대통령의 묘소를 찾는 것으로 소일하다가 1992년 봄 향년 92세로 사망해 남편 곁에 묻힙니다. 오욕이 점철된 퍼스트레이디의 인생이었습니다.

측근들은 “이 박사님이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살았다면 좋았을 걸…”하고 이구동성 아쉬워했고 괄괄한 성품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후 후덕한 여성과 결혼하지 못했던 것을 한탄했다고 합니다.  

‘영부인’하면 상징적 인물이 육영수 여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16년이라는 긴 기간이 있긴 하지만 육 여사의 인품 자체도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비쳐졌습니다. 육 여사는 충청북도 옥천 토호(土豪), 만석지기의 딸로 서울에서 학교를 나와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친지의 소개로 육군 소령인 박정희를 만납니다.

박정희는 부인과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곧 이혼을 하고 1950년 피난지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때 주례가 착각을 하여 “영수군과 정희양의 결혼식에…”라고 실언을 했던 일은 두고두고 화제가 돼 왔습니다. 

1961년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을 하고 63년 민정이양과 함께 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육영수의 시대’는 꽃이 피지만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1960~70년대를 거치며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굳혀 지면서 육 여사의 진가도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장관부인들을 주축으로 한 양지회를 설립해 양로원, 고아원 등을 자주 방문하고 연말이면 위문품을 만들어 전방에 보내는가 하면 나환자촌을 찾아 뭉그러진 환자들의 손을 잡아 주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박 대통령은 감동한 나머지 청와대에 돌아 온 육여사의 손을 감싸 쥐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물론 미화된 얘기라는 후일담이 있긴 했습니다.  

육 여사는 ‘청와대 야당’이라는 별칭을 가졌습니다. 정보기관의 각색된 동향보고와는 달리 그때그때 시중의 여론을 골고루 들어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고 ‘진짜민심’을 가감 없이 박 대통령에게 전달해 얻은 호칭이었습니다.

아무튼 ‘육영수’라는 이름 석 자는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되어 뭇 여성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유신시대 박 대통령의 권력이 하늘을 찌를 때 정권의 실세 중 한 사람은 “여사님을 국모(國母)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습니다. 왕조시대의 ‘왕비’나 마찬가지라는 과잉충성이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무리하게 3선개헌을 밀어 붙이고 유신을 선포한 뒤 오만해진데다 여색(女色)에 지나치게 탐닉하면서 청와대 안방에서는 재떨이가 날아가는 부부싸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이튿날 주변에서는 “엊저녁 육박전이 벌어졌다”고 수군댔는데 이는 육씨와 박씨가 벌이는 전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얼마 전 시조카사위인 김종필 전 총리는 육 여사에 대해 “밖에 알려 진 것과 실제는 전혀 다르다”고 부정적으로 매우 언짢게 묘사해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어떻든 육 여사는 세월이 흘러도 ‘어진 영부인’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돼 있습니다. 하지만 딸인 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국정농단으로 탄핵이 되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자 어머니가 쌓아 놓은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박 대통령 탄핵 이후 육 여사의 고향인 옥천에서는 해마다 열리는 추모제마저 시민단체들의 반대로 치르지 못할 형편이라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19대째이고 인물로는 12번째입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미혼이라서 영부인은 모두 11명입니다.

1.2.3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여사는 1948년 정부 수립부터 4·19혁명이 일어난 해인 1960년 4월 26일까지 12년 6개월 동안을 영부인자리를 지켰고 4대 윤보선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는 1년 7개월을, 5·6·7·8·9대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는 12년 5개월 동안을 영부인 자리에 있다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10대 최규하 대통령부인 홍기 여사는 8개월을, 10·11대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7년6개월을 영부인으로 있었고 13대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부터 14대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 15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16대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17대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는 모두 남편의 임기대로 5년씩을 영부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내조만 한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박사위에  육사, 육사 위에 여사”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위세를 보인이도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대학시절 캠퍼스 커플이라는 점도 남다르지만 성격이 밝고 활달해 ‘유쾌한 정숙씨’라는 별명대로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웃 주민에게 라면을 끓여준다,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사진을 찍는다, 수해 현장으로 달려가 복구 작업을 한다 등등 그의 소탈한 모습은 권위주의 정치만을 보아 온 국민들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대통령 부인은 그가 누구이건 남편과 영욕을 같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입니다. 분수없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거나 행동이 지나치면 구설을 듣게 마련이고 남편에게 욕을 먹이는 것이 십상입니다.

대통령 부인에 대한 평가는 개인이 얼마나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남편의 정치적 공과(功過)와 개인의 인격, 행동거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가 꽃핀 오늘날 대통령 부인은 오로지 대통령 부인일 뿐, 왕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김영회(언론인)  yhk9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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