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회 칼럼] 왕후장상의 씨
[김영회 칼럼] 왕후장상의 씨
  • 김영회(언론인)
  • 승인 2016.07.30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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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대학교가 지난 5월 공개한 백범 김구 선생의 조선정치학관(건국대의 전신) 개교 3주년 기념식 축사 모습. 이 행사는 김구 선생의 서거 전 마지막 공식 행사로 알려져 있다. /사진제공=건국대학교

-헌법에는 모두가 평등한데 현실은 불평등한 사회. 비뚤어진 몇 사람의 편견이 나라의 장래를 망친다. 오늘 그것을 생각한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 석 자 쓸 정도의 농사꾼이었으나 반골기질이 강했고 술만 취하면 마을 양반(兩班)들에게 심하게 행패를 부리곤 했습니다. 백범의 선대는 원래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상민(常民)이 아니었으나 1651년에 일어났던 김자점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온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황해도로 숨어들어 상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백범은 17세 되던 해 과거(科擧)에 응시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이름인 ‘김순영’으로 바꿔 시험장에 들어갑니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해 ‘상놈’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일이 흔해 번번이 낙방하기 일쑤였습니다. 밤 새워 공부하기보다는 정승의 첩을 찾아가 뇌물을 바치는 것이 쉬웠을 정도로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했을 만큼 사회가 타락해 있었습니다.

연거푸 아들의 낙방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실망 끝에 ‘마의상서(麻衣相書)’를 구해다 던져줍니다. “시험은 틀렸다. 이거나 보고 공부해서 관상이나 봐주고 먹고 살아라.” 백범은 그로부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자신의 얼굴에서 길상(吉相)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구절이 번쩍 눈에 뜨입니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얼굴이 잘나도 몸 좋음만 못하고 몸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 좋음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백범은 무릎을 칩니다. 그리고는 결심합니다. “이제부터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자”고.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흉하게 얽었던 백범의 관상이 길상(吉相)으로 나와 있을 리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급제해 ‘상놈신분’을 면해보고자 했던 어린 백범의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그가 뒤에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것은 ‘마음 넓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던 당시의 결심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처음 임시정부에서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도 우연한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형평사운동’이라는 이색단체의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 이학찬 등 백정출신의 지식인들이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폐지하며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한다’는 목적으로 모임을 결성한 우리 근대사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이었던 것입니다.

형평(衡平)이란 저울 ‘형’자에 평평할 ‘평’자가 의미하듯 바꿔 말하면 ‘평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시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직업적으로 도살하는 사람을 ‘백정(白丁)’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한 하층민으로 취급을 해 보통사람으로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백정은 기와집에서는 살 수 없고 비단 옷을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갈 때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상주들이 쓰는 ‘패랭이’라는 것을 써야 했으며 여자들은 머리에 비녀도 꼽지 못했습니다. 백정은 사는 집도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해야 했고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는 상복을 입지 못하고 지팡이도 짚지 못했으며 운구(運柩)에는 상여를 사용할 수도 없었고 무덤도 일반묘지와 떨어진 곳에 따로 써야만했습니다.

자식이 태어나 호적에 이름을 올릴 때는 앞에 ‘붉은 점’으로 백정임을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이라고 기재했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써야하는 등 조선조 500년을 억압과 천대 속에 살아왔습니다.

출신에 따라 계층을 나누는 신분제도는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 역사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이어져 온 악습입니다. 왕족, 귀족, 평민, 노예와 같은 신분제도는 동서양을 통틀어 고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입니다. 그 중에 인도의 카스트와 같은 제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유지되고 있을 만큼 끊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분제도는 그곳이 어느 곳이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피눈물을 강요했습니다. 그 보상으로 지배계급이 대가를 받은 것은 1889년의 프랑스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입니다.

프랑스혁명 때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는 것을 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녀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시끄럽게 하는가?” 시녀가 대답합니다. “빵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다”고 저런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빵이 없는데 케이크가 어디 있겠나.

혁명이 성공한 뒤 왕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시민들의 환호 속에 광장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참형(斬刑)을 당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류 최상의 가치를 역사에 수놓은 불멸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국민을 개, 돼지로 보고 폭정을 일삼은 악덕통치자에 대한 응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분의 구분은 이미 고조선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고조선의 8조법 중 ‘도둑질한 사람은 종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그것인데 그 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신분제도는 끈질기게 이어져 왔습니다.

조선의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으로는 폐지됐으나 일제 식민치하를 거치면서도 국민의 의식 속에 뿌리박힌 양반, 상놈이라는 사회적 불평등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혼사(婚事)에는 으레 신분을 앞세워 족보(族譜)가 있느냐 없느냐로 양반과 상놈을 따졌고, 그랬기에 재산을 불린 상민들 중에는 돈을 주고 족보를 사서 양반행세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분제가 사라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6·25라는 전쟁의 참화를 통해서입니다. 전쟁 통에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마당에 양반, 상놈 따질 형편이 아니었으니 혼란 속에 상하 신분이 마구 뒤섞여 버렸던 것입니다. 6·25는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전쟁이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양반, 상놈의 차별이 없어진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는 지난 시절의 ‘백정’은 없습니다.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습니다. 직업과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법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적으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여전히 다른 모습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남존여비, 우열인식이 아직 상존하고 재산의 많고 적음, 명문학교냐 아니냐, 피부색과 언어,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등의 차별은 눈에 보이게,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엄연히 존재하는 게 현실입니다.

해마다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일이면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표어를 되새기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구호를 강조하면 할수록 ‘차별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모르겠습니다.

교육부의 고위직에 있는 공직자가 “신분제도를 강화해야한다”면서 “99%의 민중은 개, 돼지이니 먹을 것만 주면 된다”는 발언으로 한바탕 풍파를 일으킨 것을 보면서 지금도 우리사회 일각에는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 꽃방석에 앉아 교육받고 성공한 엘리트라는 이들이 모름지기 힘없는 국민들과 함께 살아가기는커녕 구시대의 편견으로 국민을 개, 돼지로 취급할 때 그 자신은 물론 그 사회의 미래는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 평범한 농민이었던 진승(陳勝)은 폭정을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며 이렇게 외칩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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