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5주년에 떠오르는 기억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5주년에 떠오르는 기억
  • 이정식 / 언론인
  • 승인 2014.10.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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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조선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처단한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 의사는 105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일본 거류민 환영단에 섞여있다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를 권총으로 정확하게 저격했다. 3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30분후 절명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후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세번 외친후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었다. 하얼빈역은 당시 러시아 관할이었다. 러시아측은 안의사를 이날 밤 일본측에 넘겼다. 안 의사는 거사 다섯달 후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 거사후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일경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문득 안 의사의 4촌 동생으로 안 의사 거사 1년여 후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던 애국지사 안명근 선생의 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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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 사촌 안명근 밀고한 천주교의 뮈텔주교

눈길을 헤치며 헌병대로 달려가 밀고

조선 천주교의 수장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눈이 많이 내리던 1911년 1월 어느날 황해도 청계동 성당의 빌렘 신부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안중근의 사촌동생 야고보(안명근, 1879~1927)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이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명근이 고해성사 때 빌렘 신부에게 한 이야기였다, 
이 편지를 읽은 뮈텔은 눈길을 헤치며 헌병대로 일제 아카시 장군(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 육군 소장, 당시 헌병경찰 총책, 1864-1919)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밀고했다. 전국에 비상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뮈텔, 자신의 일기에 안명근 밀고 사실 기록

뮈텔주교는 1911년 1월 11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빌렘 신부가 편지로 조선인들이 총독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 알려왔는데 그 중심에 야고보가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카시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 열흘 뒤인 1월 21일 일기.
“아카시 장군은 야고보가 빌렘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빌렘에게 물어 보아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고 최석우 신부가 24년(1984년부터 2008년)에 걸쳐 프랑스어로 쓰여진 뮈텔주교의 일기를 번역, 공개하기 전까지는 밀고자가 뮈텔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과거 대부분의 자료에는 “안명근이 간도지역에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는데, 민병찬 등이 이를 일제 헌병에게 제보함으로써 안명근이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다”고 되어있다.
일기에서 보면 체포된 시기도 1911년 1월 이후여야 한다.

어쨌든 이후 600여명이 체포되어 윤치호,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신채호, 이회영, 장지연 등 애국지사들이 대거 고문받고 투옥되는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확대되는 안명근 사건 (또는 안악 사건)은 이같이 천주교 주교의 밀고로 시작되었다.

 뮈텔 주교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에는 ‘자신은 안중근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그는 천주교인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던 인물이다. 

▲ 프랑스인 뮈텔 주교

그뒤 그는 안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인 1910년 2월 16일 여순 재판소 일본인 검사로부터 빌렘신부의 안중근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을 받고는 “여순에 어떤 신부도 보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안중근이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뮈텔은 집안이 모두 천주교인인 안중근과 그 가족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안명근이 뮈텔을 찾아가 빌렘신부의 여순행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다시 거부한다.
그는 1911년 2월 21일에 쓴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저녁 8시가 넘어 야고보(안명근)가 빌렘 신부를 토마스(안중근)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러 왔다. 그러나 나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으나 그는 불만스러운 행동을 보였고 매우 무례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를 주기위해 여순에 다녀왔다. 돌아 온  뒤 그는 2개월 성무집행정지(미사집전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었다.
그랬던 빌렘신부가 어째서 뮈텔주교에게 신자로부터 들은 고해성사 내용을 일러바치는 짓을 했을까? 중징계후 안중근 집안의 동향을 보고하라는 뮈텔의 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빌렘의 자발적인 보고였다는 설도 있다.

뮈텔 주교의 밀고로 붙잡힌 안명근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테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이를 빌미로 조선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고 당시 국내 항일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회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결국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빌렘신부나 뮈텔 주교의 처신은 성직자로서 정상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뮈텔 주교는 당시 밀고의 대가로 명동성당 앞길을 넓히는 허가를 받아냈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는 일본이 프랑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였으며, 뮈텔 주교는 조선의 지배자인 일제와 껄끄럽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참담한 처신을 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뮈텔 등 당시 한국 천주교 지도자들의 그러한 인식과 태도로 인해 국내 천주교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 참여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대표가 한 명도 없는 이유다.

뮈텔은 1919년 3.1운동 직후 천주교 신학생들을 만나고 난 뒤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사실상 퇴교시켰다는 얘기다.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프랑스 선교사들 

이러한 뮈텔의 인식에 대해 서강대 최기영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뮈텔과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우월의식이 있었으며, 동양의 미개한 지역에 와서 봉사한다고 생각해 한국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 2011년 9월 21일자)
성직자로서의 품성과 한국인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안명근은 1911년 7월 22일,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 등’의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언도 받았다. 빌렘신부는 감옥의 안명근을 면회하기도 했다. 물론 안명근은 빌렘신부와 뮈텔주교의 그러한 짓을 알지 못했다.
안명근은 15년 가까이 옥고를 치룬 후 1924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1927년 지린성에서 48세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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