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47)
[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47)
  • 신현덕 언론인/문학박사
  • 승인 2015.07.0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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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조선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주변 국가를 우리의 휘하에 둘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조선의 무력과 세종의 덕치로 가능했다. 아버지 태종이 병권을 가지고 있어 조선군 최고 통수권자이기는 하나 대마도 왜구를 제압한 승전의 치적은 세종 몫으로 기록되었다. 공은 세종이, 위험은 태종이 감수하겠다는 의지에 따른 결과였다, 조선이 취한 절묘한 권력분립 덕택이었다. 권력의 힘과 위험 그리고 그 결과를 일찍이 체득한 태종이 세종에게 가르친 교훈이었다.

대마도, 우리 땅으로 회복을 허락하다

세종 2년(1420) 윤1월 10일 예조에서 대마도의 도도웅와가 (조선에)귀속하기를 청한다고 보고했다. 대마도의 도도웅와(都都熊瓦)의 부하 시응계도(時應界都)가 와서 “만일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웅와(熊瓦)의 말을 전달했다.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고, 벼슬을 내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선 밖의 왜구들이 우리에게 복속을 간청한 중요한 일이었다. 스스로 우리의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또 “도두음곶이[都豆音串]에 침입한 해적의 배 30척 중에서 싸우다가 없어진 것이 16척이며, 나머지 14척은 돌아왔는데, 7척은 곧 일기주(一岐州)의 사람인데, 벌써 그 본주로 돌아갔고, 7척은 곧 우리 섬의 사람인데, 그 배 임자는 전쟁에서 죽고, 다만, 격인(格人)들만 돌아왔으므로, 이제 이미 각 배의 두목 되는 자 한 사람씩을 잡아들여 그 처자까지 잡아 가두고, 그들의 집안 재산과 배를 몰수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빨리 관원을 보내어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사신이 요청했다.

조선을 침공하여 죄를 지은 왜구들을 잡아 두었으니 항복을 받아달라는 내용이다. 범죄인을 조선에 인도한다는 항복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한 50척보다 적은 30척이 조선침공에 가담하였고, 돌아온 14척 중 대마도 선적은 7척이며 선주는 죽었단다. 그리하여 원양선의 선장(격인)만 구속해 두었다는 것이다.

도두음곶 침입이란 지난해 즉 세종 1년(1419) 5월 7일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에 왜적 50여 척이 침입하여 분탕질한 사건이다. 충청도 관찰사 정진이 “본월(5월) 초5일 새벽에 왜적의 배 50여 척이 돌연 비인현 도두음곶이에 이르러, 우리 병선을 에워싸고 불살라서, 연기가 자욱하게 끼어 서로를 분별하지 못할 지경이다.”라고 비보하자, 태종이 “그 도(道) 시위 별패(侍衛別牌)와 하번 갑사(下番甲士)와 수호군(守護軍)을 징집하여”라고 명령했던 그 사건이다. 왜구가 나타나 분탕질을 해대자 조정에서 내린 국가비상사태다. 이를 계기로 조선이 본격적으로 대마도를 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박은이 이 사태를 당하여 계책으로 “국가(조선)에서 왜인을 대접하기를 극히 후하게 하였는데, 이제 우리 변방을 침략하니, 신의가 없음이 이와 같다. 평도전(平道全 원래 일본 사람이다)은 성은(聖恩)을 후히 입고 벼슬이 상호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도전을 보내어서 싸움을 돕게 할 것이니, 이제 만일 그 힘을 이용하지 아니하면 장차 어디에 쓰리오. 죽이는 것도 가하다.”라고 했다. 보고했다. 일본 사정을 잘아는  일본 출신을 전쟁에 투입하자는 전략이었다. 국가도 “(평)도전을 충청도 조전 병마사(助戰兵馬使)로 삼고, 같은 왜인 16명을 거느리고 가게” 명령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물대던 조정이 9개월 만에 드디어 결심했다. 세종은 같은 달 23일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청한 인장의 전자와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절에게 보낸다.”고 했다. “지금부터는 반드시 귀하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받아 가지고 와야만 비로소 예의로 접견함을 허락하겠노라.”며 그 인장의 글자는 “종씨 도도웅와(宗氏都都熊瓦).”라 하겠다고 통보했다.

대마도를 경상도에 속하게 하고, 보고체계는 관찰사를 통해서 하라고 했다. 조정으로 직접 보내던 공물이나 문서를 체계를 따라 행하라는 최초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종씨 도도웅와’라는 친필 성명이 없는 문서는 접수치 않겠다는 결정문이었다. 1420년 윤정월 23일이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회복하기를 승낙했다.

대마도 왜구가 다른 말을 하다

세종 2년(1420) 10월 8일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에 갔던 통역관 윤인보가 “소이전의 말을 인용 ‘거년에 조선이 우리 대마도를 쳐들어 왔으니, 우리가 병선 2백~3백 척을 청하여 조선 해안 몇 고을을 쳐부셔야 우리 마음이 쾌하겠다.’하며, 대마도 도도웅와의 아우 도도웅수는 또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가두어서 우리 대마도 사람으로서 너희 나라에 붙잡혀 가 있는 것과 같이 할 것이나, 본국과 더불어 통호(通好)하고 있기에 감히 그렇게 못하니, 그 붙잡혀 가 있는 사람들을 빨리 돌려보내게 하라.’고 하더이다.”라고 보고했다. 사신도 구류하겠다는 엄포였다. 그렇다면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태종은 즉각 반발했다. “그들의 절교할 뜻이 이미 드러났다. 나는 수군 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보내어 크게 병선을 대비하여 거제(巨濟) 등지의 요해(要害)한 곳에 모아 두고, 대마도의 왜인들이 와서 농사짓기와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들을 못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그들이 소이전과 같이 항복하기를 청할 것이고, 만약 항복을 아니하면 여러 장수를 시켜 번갈아 가면서 들어가 공격함이 옳을 것이다.”라며 다음날 대응책을 논의케 했다.

조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응책을 논하면서 대마도의 본심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본과 협력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일본과 협력하여 대마도를 고립시키자고도 했다.

그 사이 조선에 온 종정성(宗貞盛)의 사절인 구리안(仇里安)은 “본도가 경상도에 소속되었다 함은 자기로서도 알 수 없는데, 계도가 어찌 저 혼자서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망녕된 말입니다. 가령 본도가 비록 경상도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만일 보호하고 위무하지 않으면 통치권 밖으로 나갈 것이요, 본디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만일 은혜로 보호하여 주신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대마도는 일본의 변경이므로, 대마도를 공격하는 것은 곧 본국을 공격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선에게 뼈아픈 말을 했다. 국가가 보호하지 않는 국민과 영토는 그 나라 것이 아니라는 통보였다.

세종은 3년(1421) 10월 4일 대마도 왜에게 ““너희들이 말로만 귀속한다 하나, 실은 성관을 들이지 아니하니, 우리는 경상 좌·우도 여러 포구에 있는 병선과 수군을 모아서 거제도에 나누어 수비시켜 도적의 변란을 대비하게 하고, 여러 포구의 수군은 부근에 있는 시위패로 대행하게 하겠다.”고 대마도 왜구에게 알렸다. 대마도는 어느 한 나라가 영토 밖의 땅을 얻기가 어려움을 잘 나타내는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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