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46)
[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46)
  • 신현덕 언론인/문학박사
  • 승인 2015.07.0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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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한 국어학자들의 사진이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장 스크린에 비춰지고 있다. / 강민지 기자 mjkang502@womaneconomy.kr

일본도 대마도로 시선을 돌렸다. 통일과 영토확장에 재미를 붙인 이후였다.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에서 일본은 14세기 홋가이도 원주민에게서 그들 전통의 생활양식을 빼앗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이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제로 문화변조에 들어 간 뒤에 눈을 대마도로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도 대마도를 노렸다

태종이 대마도 토벌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신의 잘못된 상황판단에 대한 자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불손한 생각일까.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전인 17년(1417) 12월 19일 병조 판서 김한로에게서 일본쪽의 동향을 보고 받았다. 김한로는 도진무 이원과 함께 왜적 방비책을 올렸다.

“신 등이 지금 들으니, 대내전(大內殿) 왜인이 장차 대마도 왜인 종정무(宗貞茂)를 토벌한다고 하니, 신 등은, 종정무가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쫓겨 유리하다가 필경은 의지할 곳이 없어 우리 변방을 도둑질하여 백성이 그 해를 받게 될까 두렵습니다. 근래에 배를 타는 장졸이 전하의 성하신 덕을 힘입어서 외적이 이르지 않기 때문에 언덕에 의지하여 편안히 자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문(移文)하여 불우에 대비하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

대마도에서 쫓겨난 왜인이 우리나라로 몰려와 해를 입힐 것 즉 풍선효과를 우려하여 대비책을 마련하라고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내 마음에 생각하기를, 왜노가 비록 저희끼리 공격하더라도 변방 백성에게 크게 해될 것은 없다. 만일 이문(移文)을 하면, 백성이 반드시 놀라고 근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대책을 마련을 뒤로 미루었다. 유비문환을 앞세우기 전에 당장 백성들이 동요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자기 대에만 풍요롭고 적당하게 성장을 원하는 현재의 집권자들과 같은 생각이었던가. 이때만큼은 미래를 내다보던 태종의 자세는 아니었다.

왜구에게 항복하라고 권하다

태종은 전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구를 회유할 방책으로 친필서신을 보냈다. 세종 1년(1419) 7월17일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 등 다섯 사람에게 서신을 들고 가게 하였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에게 보낸 서신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이라며 조선이 은혜를 베풀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문서상 경상도에 속하는 분명 조선의 땅이란 것을 강조했다. 대마도에 식량을 생산할 만한 토지가 없어 해마다 식량 1만석 가량을 가져가도록 허락해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했다.

태종은 그러나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라며 경고를 날리고는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도도웅와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나머지 대관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군소(群小)들도 또한 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다 같이 갈고 심는 일을 얻게 하여, 우리 백성과 꼭 같이 보고 같이 사랑하게 하여, 도적이 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 기쁜 일임을 다 알게 하여, 이것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이며, 생활하여 갈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득에 나섰다. 항복하면 벼슬과 살 길을 마련해 주겠다는 포고문이었다. 우리 국민으로서 너그러이 받아들이겠다는, 아량을 베푼다는 표시였다.

동맹군이지만 국가정보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태종은 왜구에게 항복하라고 서신을 보내고는 나흘 뒤(21일)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것을 구해낸 중국인 130명을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 이들에게 옷과 갓·신·포목을 주어서 보냈다. 병사를 움직여 일본을 쳤지만 중국을 상대로 군사력을 움직이지는 않겠다는 신호다. 동맹군에게 보내는 호의 표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 내부에서 이견이 일었다. 22일 대마도 원정에 나섰던 박실이 “대마도에서 패군할 때 호위하던 한인(漢人) 송관동(宋官童) 등 11명이 우리 군사가 패하게 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으므로, 중국에 돌려보내서 우리나라의 약점을 보이는 것은 불가합니다.”고 강력하게 반대한다.

비록 자기의 지휘 잘못으로 패했지만 약점을 고스란히 동맹군에게 보일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자기가 패한 전투를 동맹군에게 감춰 창피함을 피해보자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의 뜻은 작전정보를 고스란히 넘겨주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충성심이라고 하겠다.

동맹군이지만 우리의 군사정보를 다 제공하여 유사시에 우리의 약점을 역공 당하지 않겠다는 치밀함이다. 작전상황과 병력 운영 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을 내줄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조치였다. 우의정 이원과 변계량 허조 등은 그러나 “마땅히 풀어 보내어 사대의 예를 완전히 해야 합니다.”라고 예의 사대론을 들고 나왔다.

대마도가 항복을 요청하다

세종은 혜안이 있었다. 중국어를 말하는 역관을 보내어 송관동 등 11명을 중국까지 가는 길에 관찰하고, 탐문하고, 보고하게 했다. 송관동은 대마도에서 벌어진 전투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송관동은 “이번 싸움에 전사한 것이, 왜인이 20여 명이고 조선 사람이 백여 명이라”고 전쟁결과는 물론 “대마도란 곳은 길이는 한 3백 리가 되겠고, 너비는 60여 리 되겠는데,”라는 대마도의 지형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조정이 이 보고를 접하고 처리를 논하자 역관 치운이 “중국의 군병으로도 달단(몽골)을 치다가 죽은 사람이 반이나 넘는데, 백여 명의 죽은 것이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라고 중국의 패전 예를 들며 옹호하고 나서자 태종이 그대로 따르고 만다.

현행 우리나라 법으로는 미국이나 일본 독일 영국 등을 위해 간첩행위를 해도 그를 처벌할 수 없다. 처벌할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정부, 국회, 사법부 심지어는 일부의 국회위원과 군장성 정보관련자들까지도 동맹국 끼리 무슨 간첩죄냐고 말한다. IS에 가 있는 우리국민이 IS와 손잡고 만약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더라도 여적죄로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다. 이를 방관하는 현재 우리나라 관계자들과 당시 중국인을 보내자는 사람들이 무엇이 다를까.

세종 1년(1419) 9월 20일 대마도 수호가 신서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었다. 이와 함께 인신(印信)을 요청하며 토산품을 바쳤다. 조정은 그러나 대마도 전체가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은 전쟁준비와 항복접수 대응책 등을 동시에 준비했다.그런 가운데 해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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