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정적의 약방문
[칼럼]정적의 약방문
  • 김영회 언론인
  • 승인 2015.07.0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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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은 흙먼지도 사양하지 않고
바다는 작은 물도 가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크나 큰 산을 만들고
깊고 깊은 강과 바다를 이룬다"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조선조 효종, 현종, 숙종시절 문신(文臣)이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을 대표하던 양대 산맥(山脈)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당대의 석학으로 손꼽혔으면서도 사사건건 대립하며 싸운 그야말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앙숙이었습니다.

우암 송시열은(1607~1689)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천 번이나 등장할 만큼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 성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 시인, 서예가, 교육자, 작가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면모를 보이면서 북벌론(北伐論)으로 조선의 자긍심을 높였지만 예송논쟁을 통해서는 허목과 맞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예송논쟁(禮訟論爭)이란 왕실의 의례, 즉 임금이나 왕족이 죽었을 때 상복(喪服)입는기간을 3년으로 할 것인가, 1년(朞年)으로 할 것인가, 9개월(大功服)로 할 것인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심하게 대립했던 것을 말합니다.

송시열은 효종이 죽었을 때의 1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을 이겨 서인의 시대를 열었지만 효종비가 죽은 2차 논쟁에서는 허목의 남인에 밀립니다. 거기다 숙종비인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를 사 국문(鞠問)을 받으러 서울로 압송돼 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다 합니다.

송시열은 성격이 직설적이고 주장이 강해 곧잘 적을 만들었고 두 차례에 걸친 남인과의 예송논쟁으로 파란만장, 부침(浮沈)을 거듭했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뒷날 정조는 그의 공로를 높이 사 나라의 스승으로 인정해 송자(宋子)라는 성인의 존칭을 추숭(追崇)합니다.

미수(眉叟) 허목(1595~1682)은 송시열보다 열두살이 많은 유학자로 역사가, 교육자, 화가, 서예가, 작가, 사상가 등 송시열에 뒤질 게 없는 남인(南人) 청남파의 영수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정승 반열에 올라 우의정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보복을 당하지 않고 88세까지 천수(天壽)를 누립니다. 허목은 젊은 시절 산림에 묻혀 글만 읽다가  56세가 돼서야 늦깎이로 말단 벼슬인 능참봉이 내려졌고 80세가 돼서야 정승에 오릅니다.

허목은 송시열과 달리 주자학적인 유교해석을 거부하고 “유교사상만이 진리는 아니다”면서 “벡성을 죽일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다”고 당시로서는 하기 힘든 명언을 남깁니다. 또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대해서는 “학문에는 차례가 있고 공(功)에는 순서가 있는데 그 사람은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쓰는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승려”라고 모욕적인 공격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송시열과 그 세력들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곤욕을 당합니다. 사문난적이란 조선시대 유교이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역적 시 하여 공격하던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목은 재물에 욕심이 없어 가난한 생활을 오히려 즐기며 자유롭게 살았는데 소탈하고 개방적인 성격은 자신이 직접 지은 아호(雅號)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늙은이 눈썹’이라는 뜻의 ‘미수(眉叟)’라고 호를 짓고는 “늙은이의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고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우암과 허목, 이들 두 사람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1차 예송논쟁에서 우암의 승리로 끝이 나자  남인들은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귀양을 가야했고 허목도 강원도 삼척부사로 쫓겨 갔습니다.

그 때 우암이 심하게 체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팔도의 명의를 모두 불러 봐도 효험이 없자 고통을 이기느라 초죽음이 된 우암은 아들을 불러 “미수에게 가서 약 처방을 얻어 오라”고 명합니다.

아들은 의아했지만 아버지의 분부대로 삼척으로 미수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처방을 부탁합니다. 그러자 미수는 “약은 무슨 약 비상이나 한 숟가락 먹으라지”하고 퉁명스럽게 내 뱉으며 처방전을 써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비상(砒霜)이라면 독약인데, 그것을 약으로 쓰라니 말이 될법한 일인가.

그러나 우암은 달랐습니다. “미수가 그랬다면 틀림이 없겠지. 어서 약을 가져오너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놀라 “아니, 그건…”하고 주저하였으나 우암은 “어서!”하고 호통을 쳤고 결국 그는 비상을 먹고 체한 것을 뚫었습니다.

그때 우암은 매일 아침 식전에 간장을 한 종지씩 마시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있던 미수는 웬만한 약으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넌지시 극약인 비상을 처방해 주었던 것입니다.

정적(政敵)이었지만 상대방의 인품을 신뢰하고 처방을 부탁한 송시열이나 오해의 소지를 무릎 쓰고 바른 처방을 해준 허목이나 대인답기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현실정치에서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지만 인간적 측면에서는 ‘친구’였던 것입니다. 한 때 송시열의 사형을 주청(奏請)한 적도 있었던 허목이었습니다.

300여 년 전의 일화이지만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오늘 우리 정치판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백성들의 삶은 도외시하고 복상기간을 놓고 허구한 날 싸움을 벌였던 그 때나 사사건건 말 꼬리를 잡고 시비를 일삼는 오늘이나 다를 것은 없지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큰 인물들이 있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그릇'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큰 그릇, 정치인으로서 도량이 얼마만한가, 그것이 충요합니다.

정치는 오기(傲氣)로 해서는 안 됩니다. 넓은 가슴으로 해야합니다. 그게 정치입니다. 그런데 ‘배신의 정치’니 ‘심판’이니 하는 살벌한 소리가 난무하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烈傳)'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태산불사토양고대(泰山不辭土壤故大) 하해불택세류고심(河海不澤細流故深), 태산은 작은 흙먼지도 사양하지 않아 큰산을 이루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 깊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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