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38)
[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38)
  • 신현덕 언론인/문학박사
  • 승인 2015.06.04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실 내 한글에 관한 세계의 유명 인사들의 한마디가 적혀있다. / 강민지 기자 mjkang502@womaneconomy.kr

 세종, 한성을 선물로 받다

 조선왕조 실록은 세종 4년(1422) 1월 15일 허물어진 한양도성을 고쳐 쌓고 보수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이날 실록은 “도성을 수축하고 4개의 구료소를 설치해 군인들을 치료하다.”라고 했다. 실록은 이날 시작한 공사를 ‘수축’이라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성을 다시 쌓는 대공사였다.

 태종은 이 태조가 한성을 처음 쌓을 때보다 약 3배가 되는 군사 32만2400명을 동원해 1달 반 만인 2월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속전속결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다. 가히 속도전이었다. 이런 규모의 성을 쌓으면서 이보다 빠른 공사는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문에서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고 나서 모든 일을 서두른다고 지적했을까. 그는 1444년(세종 26년) 2월 20일자 상소문에서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라고 지적했다. 말 그대로 훈민정음뿐만 아니라 국사를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정치는 차근차근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것으로, 서두르는 것은 결코 현명치 않은 통치방법이라고 진언했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를 모았다”고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자.

 당시 병권은 태종이 가지고 있었다. 8도에서 대규모 병사를 동원하자니 당연히 태종이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로 성을 쌓는 일이 태종의 책임이 되었다. 세종은 현직에 있으면서 국가적 사업을 아무 책임도 없이 시행한 셈이다. 한성을 다시 수축한 것은 태종이 세종에게 넘겨준 세자로 책봉한 것과 함께 커다란 선물이 되었다.

 태종은 처음에 성을 돌로 다시 쌓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무너지고 허물어진 곳만 손보려고 하였다. 세종은 3년(1421) 10월 25일 날 도성의 개축과 보수에 관해 신하들과 논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토성을 돌로 쌓자고 합의했으나 태종이 반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세종은 “태상왕은 그대로 두고 수축만 하려 할 뿐이니, 내가 다시 계하겠다.”고 결심한다. 이렇게 하여 한성이 세종 때 모두 석성으로 개축된다.

 돌로 쌓는 것이 세종의 진언이나 실제로는 태종의 결단에서 비롯됐다. 돌로 성을 쌓는 것에 대하여 “옛날에 흙으로 싼 성을 모두 돌로 고쳐 쌓는다면, 만 년 두고 장구한 계책이 됩니다.”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자기 재임시에는 실천하지 못했다. 태종은 왕위에 있을 때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였다.(16년 10월 13일) 하지만 돌로 쌓지는 않았다. 세종이 돌로 쌓자고 건의하기 5년 전이었다. 태종은 중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 황제와 겨루기 위한 것이라고 시비를 걸면 책임도 자기가 져야하는 자리였다.

 이제는 달라졌다. 왕은 세종이었다. 병권은 태종이 가졌다. 성은 병사들이 쌓는 것. 만약 중국이 외교적으로 문제를 삼아도 세종에게 책임을 묻기가 곤란했다. 태종은 이점을 노렸다. 세종을 보호하려던 큰 뜻을 감춘 결정이었다.

한양에 처음 성을 쌓다

 태조 5년(1396) 1월 9일 실록은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安州)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民丁)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고 기록했다. 또 공사를 하면서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白岳: 북악산)의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고 기록, 공사구간을 나누고 구역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겼다는 것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서쪽 산 돌재(石嶺)까지 합해서 땅의 척수가 무릇 5만 9천 5백 척(尺)이요, 6백 척마다 한 자호(字號)를 붙였으니, 모두 97 공구가 되었다.

 실록은 또 성을 쌓으면서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심히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태조는 공사시작 5일 뒤인 1월 20일에도 “내신(內臣)을 성 쌓는 곳에 보내어 근일의 혹독한 추위로 얼어서 죽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이제부터는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은 역사를 시키지 말게 하라.” 유시하였다.

 공사는 태조 5년(1396) 2월 28일에 끝났다. 이날로 성 쌓는 역부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최대 난공사는 동대문 근처였다. 비가 오면 이쪽으로 모여, 성안의 빗물이 빠져나갈 수문이 3간이 있었는데 장마가 지면 모자랐다. 이 역사를 하면서 동시에 다시 2간을 더 늘려 5간으로 만들었다. 공사는 수구(水口)에 구름다리(雲梯)를 쌓고 양쪽에다 석성을 쌓았다. 높이가 16척, 길이가 1천 50척이었다. 현재 동대문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잇는 청계천 다리 동쪽에 모형만 세워진 5간 수문이다. 이곳은 “지세가 낮으므로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뒤에 성을 쌓느라 그 힘이 다른 곳보다 배나 되었다.”고 한다. 짧은 구간에 성을 지키기 위한 각종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대문에는 한성의 4대문 중 유일하게 문을 지키는 또 하나의 작은 옹성이 문을 보호하고 있다. 5간 수문을 지키기 위해 망루역할을 하던 치(稚 꿩처럼 사방을 감시하라는 뜻)도 총총히 있다.

 그래서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 현장 감독관은 세종에게 “동대문의 역사는 10여 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옵소서.”하고 청했다. 한성부사가 반대하고 나섰다.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근간에 분부가 계시기를, ‘씨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 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안동과 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며,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 때 공사실적은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4.5m나 되었으며, 길이가 5.8㎞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아래의 넓이는 7m, 위의 넓이는 1.5m, 높이가 7.5m이며, 길이가 13㎞이었다.”했으니 석성이 약 32% 토성이 68%가량 되었다. 각도의 도세와 백성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자(天字)로부터 일자(日字)까지는 동북면이, 월자(月字)에서 한자(寒字)까지는 강원도가, 내자(來字)에서 진자(珍字)까지는 경상도가, 이자(李字)에서 용자(龍字)까지는 전라도가, 사자(師字)에서 조자(弔字)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공사 계획과 구간 나눔 그리고 감독이 이처럼 합리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성을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한 자세한 기록이 어디에 있을 만도 한데 전해오지 않는다. 한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아직도 등재되지 못한 이유이다. 혹시라도 일본이 가져갔다면 어디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의 건축기술과 당시의 사정을 아는데도 커다란 도움이 될 터인데 정말 아쉽다.

 이 때 한 공사는 1차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 2차로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였다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날자 실록에는 흔적이 없다. 다만 9월 24일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시작도 있었을 것이다.

 가을 공사에서는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 높은 사다리)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고 했다.

 1차 보수공사와 함께 각 문을 지었다. 4대문과 4소문이 이때 지어진 것이다. 4방의 정방향에 대문을, 그 사이에 소문을 지어 방어와 통행을 하게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