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35)
[연재]세종, 조선천년을 그리다(35)
  • 신현덕 언론인/문학박사
  • 승인 2015.05.2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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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전시관 내 일제치하와 맞서 한글을 지켜낸 외솔 최현배 선생의 신념인 '한글이 목숨이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 강민지 기자 mjkang502@gmail.com

 집현전 훈민정음에 반기를 들다

집현전은 글자 훈민정음이 발표되고 곧바로는 지금껏 알지 못하던 글자에 관한 일이라 진상을 파악하느라 어떤 의견도 낼 수 없었다. 왕이 하는 일을 감정만 앞세워 섣불리 들고 나섰다간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내세우기 좋아하는 명분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집현전은 글자 훈민정음 창제 발표 이후 새해 들어 왕실의 동태를 파악하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세종이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발표한 날이 섣달그믐이었고, 정월달은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명절이 이어져 제대로 업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종도 훈민정음과 관련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세종이 26년(1444) 2월 16일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는 작업을 지시했다. 글자 훈민정음의 본격적인 후속작업이다. 책자 훈민정음을 포함한 훈민정음의 사용실례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세자를 포함한 왕자들과 정인지 성상문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그 때서야 집현전에서 들고 일어났다. 나흘 뒤(2월 20일) 최만리를 포함한 7명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역사에서 책자 훈민정음의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집현전에서 글자 훈민정음에 대하여 최초로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세종이 화를 냈다. 이날 실록에는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고 되어 있다.

세종은 신하들이 상소를 했으므로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자리를 마련했다. 상소가 오면 꼭 답변을 하려고 했던 세종은 평소처럼 행동한 것이다.

세종은 그들에게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세 한탄도 섞어서 타이르듯 말했다.

한편으로는 언어학적 지식으로 그들과 맞장 토론을 한다. 실력으로 겨루자는 뜻이다. 왕과 신하가 아니라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론을 내세웠다.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고 지적했다.

세종이 타이르듯, 설득하듯 조곤조곤 이야기 했다. 실력에서 월등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집현전 7인은 그들의 의견을 접지 않았다.

이들은 훈민정음에 대하여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면서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 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라고 변명도 늘어놓았다.

결국에는 왕과 세자를 걸고 들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라며 위하는 척 폐부를 찌른다.

집현전 7인이 왕 앞에서도 우격다짐으로 불가함을 이야기 하고, 더군다나 말을 바꾸니 세종은 용서할 수 없었다.

세종은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라고 힐난하였다.

세종은 앞서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삼강행실을 번역케 하였는데, 이제와 다른 의견을 이야기 하는 것에서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세종은 드디어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그리고 7인 중에서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세종은 다음날 이들을 모두 석방했다. 형식적으로 옥에 가두는 벌을 주고는 특별사면한 것이다. 최만리는 이날 옥에서 나오자 학자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낙향한다. 세종이 말한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에 답하지 못한 것이 학자로서 가슴 아팠다. 그리고 다음해에 세상을 뜬다. 본받을 학자다.

다음 날짜(2월21일) 실록은 세종의 명에 따라 의금부가 김문에게 장(杖)(1) 1백대에 도(徒)(2) 3년 형을 구형하자 세종이 “장 1백 대를 속바치게(3) 하였다.”고 기록했다.

세종이 김문의 형을 많이 감해 준 것이다. 도(徒)는 아예 빼버렸고, 그리고 장 1백 대도 속바치도록 온정을 베풀었다. 벌은 주되 가혹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상징적인 벌이었다.

의정부는 김문이 대제상서사불이실(對制上書詐不以實: 임금이 요구하는 보고서에 거짓으로 속이며 사실대로 고하지 않음) 죄를 저질렀다면서 대명률에 따를 것을 아뢰었다. 대명률은 이 죄를 저지르면 ‘장 1백대와 도 3년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금부는 법이 정한 형량대로 구형한 것이다.

 (1)장(杖) : 옛날 다섯 가지 형벌(五刑) 가운데 하나이다. 장형(杖刑)이라고도 한다. 곤장 또는 대형장(大荊杖)으로 볼기를 치던 형벌이다. 60,70,80, 90, 100대의 5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속전(贖錢)을 내어 곤장 맞는 수를 깎거나 면제받을 수도 있었다. ‘有錢 贖錢 無錢 杖’인 셈이다.

(2) 도(徒) : 노역을 부과하는 형벌이다. 기간은 1년에서 3년이었고 국가 정한 장소에서 중노동을 하는 벌이다.

(3) 속바치다 : 죄를 면하기 위하여 돈(贖錢 속전)을 바치다. 속전은 화폐가치가 떨어질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증액했다.

세종 4년(1422) 10월 22일 호조에서 계하기를, “영락 4년 3월 일에 의정부에서 판정(判定) 받은 동전(銅錢) 1관(貫)을 다섯 새 베[五升布] 1필로 쳤었으나, 그 때에는 저화(楮貨) 10장으로 계산하여 작정한 물건이라도, 지금은 3, 4배나 되어 경중(輕重)이 맞지 아니하니, 이제부터는 속전(贖錢)을 받을 때나, 장물(贓物)을 계산할 때에는 동전(銅錢) 1관(貫)을 저화 30장으로 쳐서 계산하도록 하겠습니다.”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 5년에는 곤장이 1백대에 이르면 모든 죄를 불문하고 직첩을 회수 했다.

(4)대제상서사불이실(對制上書詐不以實) : 임금이 요구하는 보고서에 거짓으로 속이며 사실대로 고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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